<헤이그특사 100주년> ①특사 이준의 죽음

헤이그특사 삼총사
할복자살에서 분사로, 그 다음은?
※ 편집자주 = 올해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개최 100주년이 되는 해이면서, 오는 14일은 이 회의에 대한제국 고종황제 특사단 일원으로 이상설ㆍ이위종과 함께 파견된 이준이 ‘분사’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이 헤이그특사사건을 지난 1세기 동안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 왔고 이 과정에서 이준 죽음의 진상은 어떻게 변모했는지,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은 어떠했으며, 나아가 이를 기념하는 국내외 움직임은 무엇이 있는지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내 포털사이트 중 이용객이 가장 많다는 A사가 제공하는 백과사전 ‘헤이그특사사건’ 항목에는 고종이 주도한 1907년 6-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의 특사활동이 실패하고, 그 여파로 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강제 퇴위되었음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러나 일제와 친일각료들은 이 조칙을 ‘양위’로 왜곡 발표하고, (7월)20일에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및 경찰관서 등을 습격, 파괴하고 친일괴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서울 장안은 유혈과 통곡소리로 수라장이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이 초래한 이런 후폭풍의 풍경은 중ㆍ고교 교육을 마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대체로 의심할 수 없는 사실(史實)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흥분한 서울 장안을 유혈과 통곡소리로 몰아넣은 주체가 ‘군중’이었을까? 더 나아가 서울 장안은 정말로 온통 유혈과 통곡소리로 넘쳐났을까?
혹여 10만명 안팎으로 추산되던 당시 한양 인구 절대 다수, 적어도 절반 이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나와 무에 상관이랴 하지 않았을까? 혹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헤이그특사사건의 이런 풍경들이 어쩌면 대단한 과장은 아니었을까?
헤이그특사사건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특사단 일원 중 이준이 분사건 자결이건 헤이그 현지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며, 이 사건을 빌미삼아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킨 것 따위도 엄연히 사실이다.
하지만 흥분한 ‘군중’들로 인해 서울 장안이 유혈과 통곡소리로 수라장이 되었다는 기술은 어쩌면 저만큼 ‘통분할’ 일에는 그만한 반응을 보였어야 한다는 우리의 욕망이 빚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어떻든 지금의 우리는 대체로 헤이그밀사사건을 그렇게 기억한다.
약 반세기 전, 그 때의 헤이그특사 사건에 대한 기억은 어떠했을까.
1946년 11월13일자 ‘국민보’라는 신문에는 ‘헤이그밀사의 피의 기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준 밀사는) 세계평화회의에 한국대표의 참가 결의 모순을 지적하는 애절통분(哀切痛忿)한 연설을 한 후, 미리 준비하였던 예리한 단도로 배를 가르고 자살하여 세계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오-위대한 충신 이준-열사여-만국에 빛날 의(義)와 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혈통적인 애국적 기운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이 신문이 말하는 ‘이준 밀사’의 행동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헤이그특사사건의 또 다른 통설이었다.
한데 이보다 16년이 지난 같은 국민보 1962년 9월12자에 수록된 ‘외국땅에 묻힌 고혼’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네덜란드의 묘소에서 잠들고 있는 일성(一醒) 이준(李儁)) 선생이 별세한지 5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준열사는 분한 가운데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다른 보도를 하고 있다. 미리 준비한 예리한 단도로 할복 자살했다는 보도를 분통이 터져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분사(憤死)로 바꾼 것이다.
헤이그특사사건 10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이명화 책임연구원은 이준의 사인을 둘러싼 변화의 전말을 새삼 정리한 바 있다. 분사가 어떤 맥락에서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언제, 어떤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둔갑했는지를 각종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것인데, 이준 ‘분사’ 당시에 이미 국내 민족주의 계열 언론들은 ‘할복자살’로 전달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전해진 할복자살설은 이내 역사적 사실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특히 독립운동 진영에는 ‘대(大)일본제국’을 향한 전의를 불태우는 원료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이준의 할복자살설은 간단히 말해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준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열사’라는 수식어. 분사건 할복자살이건 그가 조국 조선(대한제국)을 위해 자기 몸을 바쳤다는 점에서 하등 차이가 없다 할 수 있지만, 그의 죽음을 할복자살도 분사도 아닌 단순한 ‘객사'(客死)로 보는 시각도 상당 부분 엄존한다. 관련 학계 사석에서는 종종 오가는 말이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그의 죽음을 두고 이런 표현을 공개적으로 올리는 사람은 없다.

헤이그특사들의 활동
그의 죽음 이후 100년이 흐른 지금, 초기의 ‘진실’이었던 할복자살설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한 때의 ‘전설’이 되어 자취를 감추고 분사라는 설이 정답처럼 통용된다. 이런 사정에서 이준을 열사로 알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객사’라는 또 다른 주장은 용납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이 할복자살에서 분사로 바뀌었듯이, 분사에서 다시 ‘객사’로 바뀔 가능성은 아주 없을까? 이 대목은 그 여파가 자못 크기에 정말로 냉철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준이 분사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그와 함께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증언이다.
이위종은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이준의 죽음이 분사인가 할복자살인가는 사실 대수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제3의 죽음’이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 진상이야 무엇이건 이 시점에서 다만 하나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당분간 한국의 강고한 민족주의가 이준을 ‘열사’와 ‘분사’라는 범주로만 묶어두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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