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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하사가 자결하라며 수류탄 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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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김도형 특파원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은 전쟁의 광기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으며 맹목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를 증언해준다.  끔찍한 집단적  동반 살육은 이성을 말살해버린황민화교육과  반복적인 세뇌작업의 결과였다.  태평양 전쟁이 좀더 지속되었더라면 오키나와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연되지 않았으리라는 단정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총후보국’과  ‘결전태세’를 앞장서 외치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친일군상들을 떠올리면서, 이 땅에서 옥쇄가 벌어지지 않은 사실을 천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일본정부와 우익은 전쟁이끝난 지 60년이 넘도록 반성은커녕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면서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미화하고 있다.이제  일본의 일부가 되어버린 오키나와에서 들려오는 절규조차 외면하고 있는 일본의 외눈박이 역사인식을 비극적으로 전해주는 한겨레신문의 르포기사를 전재한다. -편집자 주-


 


 












 









 






» 일본 오키나와현 교직원노조 소속 교사 등이 지난달 29일 나하시의 번화가인 국제거리에서 오키나와전 주민 집단자결과 관련한 당국의 교과서 기술 변경을 규탄하고, 제소당한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지원하기 위한 서명운동 펼치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3월30일 오키나와전의 가장 처참한 사건인 주민들의 집단자결과 관련해 “일본군에 의한 강제 또는 명령은 단정할 수 없다”며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의 강제’라는 기술을 삭제하도록 하는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오키나와 집단자결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 오키나와현 자마미섬, 도카시키섬, 게류마섬에 미국이 상륙하자 8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수류탄과 면도칼 등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서로 죽인 사건을 말한다. 오키나와 현지취재를 통해 이 사건의 진실과 일본 정부의 교과서 기술 삭제 의도를 추적했다. 편집자

1945년 3월28일 일본 오키나와현 남단 도카시키섬의 한 참호 안. 전날 섬에 상륙한 미군의 함포사격을 피해 밤새 8㎞ 가량을 걸어 마을 뒷산 동굴의 피난처에 도착한 마을 사람 600~8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참호 밖은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채 비구름이 낮게 깔려 이날의 비극을 예고하는 듯 했다.

마을 촌장이 ‘천왕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16살 소년 긴조 시게아키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절망적으로 직감했다. 일부 마을사람들과 방위대원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꺼냈고, 그 가족들과 친척들은 빙둘러 앉았다. 여기저기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류탄에 의한 죽음은 극히 적었다. 동굴 안에 모인 사람 수에 비해 수류탄 개수가 적은 데다가 조작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불발탄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지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때 마을의 지도자격인 50대 남자가 나뭇가지를 잘라 부인과 자식을 마구 때려 죽이는 장면을 어린 긴조는 목격했다. 그 이후 면도칼, 끈, 곤봉, 돌 등 모든 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이는 흉기로 변했다. 긴조도 “형과 함께 어머니와 동생에게 손을 댔다”며 “어머니의 목숨이 끊어졌을 때는 돌멩이가 도구가 됐다”고 말했다. 그 동굴에서 329명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지난달 27일 오키나와현 나하시 ‘나하중앙교회’에서 만난 긴조(78) 목사는 62년 전 오키나와 전투 때의 집단자결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서 ‘일본군에 의한’이라는 주어가 삭제된 것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왜 당시 살아남은 부대장의 의견만 듣고, 당시 체험자나 연구자의 연구결과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지 화가 난다.”
 







 









 






» 오키나와에서 활동 중인 조각가 긴조 미노루(68)가 10년에 걸쳐 제작한 100m 길이의 부조 ‘전쟁과 인간’가운데 집단자살 장면.


 


당시 살고 있던 도카시키섬에서는 미군이 상륙하기 일주일 전에 군의 병기담당 하사관이 수십명의 마을 사무소 남자 직원들과 청년들에게 수류탄 2개씩을 건넸다고 한다. “한발은 적을 만났을 때 던지고, 나머지 한발은 자결하라.” 그는 “천황으로부터 수여받은 중요한 무기를 군대가 비전투원에게 주는 일은 절대 없다”며 “주민에게 나눠준 수류탄은 일본군이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주민들의 정신상태도 사태의 비극성을 더했다. 그는 당시 주민들을 지배했던 ‘군관민 공생공사’라는 말이 집단자결을 읽는 주요 열쇳말이라고 말했다. ‘귀축영미’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미군에게 체포되면 팔다리가 잘리고, 여자들은 ‘욕을 본다’는 강한 공포감이 있었다고 한다. 황민화 교육으로 주민들 온몸에 새겨진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실제 상황이 되자 공포심으로 변한 것이다.

중국전선에서 돌아온 일본군이 저지른 갖가지 만행이 은연중에 퍼지면서 이런 공포심이 배가됐다. 일본군이란 배경이 없었으면 수백명이 한꺼번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당시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인이 배가 고파 밭에서 고구마를 캐먹다 총살당하고, 오키나와 방언를 사용한 주민들이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하는 등 일본군은 마을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고 정상적인 상태가 되자 가족을 죽였다는 고통과 고뇌가 더욱 깊어졌다. 2년쯤 지나 기독교인 선배로부터 받은 성서를 읽고 목숨, 죽음, 영원한 구원이란 말에 강렬한 끌림을 받았다.
 









 









 








» 오키나와현 나하시 나하중앙교회에서 만난 긴조 목사


 


 


 


그 뒤 오키나와그리스도교대 교수가 된 긴조 목사는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1972) 직전부터 인간을 황폐화시킨 일제 황민화교육의 실상과 전쟁 체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신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대중 앞에 증언자로 나섰지만, 마음에 맺힌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집단자결 문제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됐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그때의 체험을 이야기해주면서 ‘살아남은 게 두렵다는 것은 체험자 이외에는 모를 것’이라고 하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문에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가족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썼다. 그게 정상적인 감각이다. 그때 우리의 상황은 살아남는 게 두려운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회상하기 싫은 과거의 잘못을 지워버리려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개탄했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진보하는 것은 없다. 아름다운 나라 운운하지만 과거 어두운 역사에 대해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비로소 아름나운 나라가 된다.”

1945년 3월26일 미군이 최초로 상륙한 오키나와 자마미섬의 한 참호 안에서 수류탄 자폭으로 누나를 잃은 미야기 쓰네히코(73)는 ‘일본군에 의한’이란 표현을 삭제한 것은 ‘폭거’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당시 마을 군 책임자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명령을 내렸는지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당시 지도자로서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교사 출신인 그는 19년 전부터 매년 오키나와 전쟁 체험자를 한 명씩 선정해 체험담을 담은 소책자를 발행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누나를 두고 동굴에서 나와 최후를 보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어머니의 회한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고 당시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본 정부는 교과서 바꿔쓰기를 통해 ‘과거 일본군의 싸움은 아름다운 전투였다, 집단자결은 미담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한겨레신문, 07.05.06>

글·사진/나하(오키나와)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역사왜곡 뒤엔 늘 자유주의사관연구회가
한겨레 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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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오후 2시께 오키나와현 나하시의 중심가 국제거리. 오키나와현의 교직원노조 소속 교사 20여명이 황금연휴를 맞아 분주하게 오가는 시민들을 상대로 서명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주민 집단자결 문제와 관련해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재판을 지원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부대장과 그 유가족들이 부대장의 책임을 언급한 오에 겐자부로의 서적 <오키나와 노트>(1970년 출판)를 뒤늦게 문제삼고 나서자 문부과학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대장의 증언을 이유로 교과서 기술을 삭제했다.

그런데 이 부대장을 막후에서 움직인 게 자유주의역사사관연구회(회장 후지오카 노부카쓰 타쿠쇼쿠대학 교수)다. 1995년 ‘자학사관으로부터 탈피’를 목표로 내세우며 결성한 이 모임은 난징대학살 희생자 축소와 일본군 위안부 기술 삭제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2005년 중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이 사라지자 이 모임은 그해 4월 3탄으로 ‘오키나와 프로젝트’를 띄웠다. 5월엔 집단자살이 일어난 오키나와섬에 들어가 증언 청취를 하는가 하면 긴급집회를 열어 교과서에서 관련 기술 삭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후지오카 대표는 2005년 모임 기관지인 <역사교육> 7월호에서 “이번 여름 군 명령에 관한 관계자를 근거없이 비방해온 일군의 저자에게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행동을 일으킬 준비도 하고 있다”며 소송을 예고했다. 실제로 2005년 8월 옛 일본군 부대장의 명예훼손소송이 제기됐다.

그렇다면 이들은 집단자결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원고쪽은 재판정에 제출한 자료에서 “집단자결이라는 도카시키마을의 처참한 역사는 명령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선택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오하마 도시오 오키나와현 교직원노조 위원장은 “군의 명령이 없었다고 하면 오키나와 현민은 당시 자신들의 의사로 일본군의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순국미담이 된다”고 우려했다. 이들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움직임은 아베 총리 등 현 집권 세력의 생각을 대변해 움직이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이번 교과서 검정 결과는 오키나와 주민학살이나 아시아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자학’이라는 아베 총리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야마구치 데쓰야 류큐대학교수(교육사회학)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이 집단자결 문제에서도 그대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학살한 오키나와전의 진실이나 위안부 문제, 난징학살 같은 잔학한 사건은 군대를 보유하려는 아베 총리에게 좋지 않은 기억, 지우고 싶은 기억일 것”이라고 꼬집었다.나하/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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