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봉준이 꿈꾸던 ‘됴흔세상’은
1895년 오늘 전봉준(1855년생)이 서울에서 사형당했다. 고부 ‘민란’에서 이날까지 1년4개월 남짓 녹두장군의 족적과 사고는 숨막히는 고통의 감동으로 점철된 우리 민중사의 절정이었다.
임이 30대 말에 구상한 반란계획,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1844~1912)을 목벤 뒤 전주 감영을 함락하며 곧 이어 병력을 휘몰아 서울을 공략하겠다는 이 폭동의 파노라마는 고부-전주-서울, 즉 읍 단위에서 도 단위로 그리고 왕도로 확대 재공격하는 전국 단위의 대규모 내전이었다.
굶주리고 헐벗고 병에 찌든 ‘무지렁이’ 백성에게 ‘됴흔세상’을 펼치는 것이 그 목표였다.
1894년 4월 말, 백성군대는 조선의 정신적 수도인 전주를 함락해버렸다. 전국이 진동했다. 그간, 야간 기습으로 관군을 궤멸시켜 일거에 관에 대한 백성의 공포감을 해소시킨 황토현 전투, 2만여 백성 앞에서 장쾌하게 연출된 함평벌 군사퍼레이드(효종때 1만3000여 관군의 한강 백사장 퍼레이드 이래 최대).
이렇게 살맛나는 쾌거를 집적시킨 원동력은 재야에서 민족·민중의 구원자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대원군의 감국(監國=집권)을 ‘반란’ 수뇌부가 약속한 데에 있었다. 이어 청일전쟁, 일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정권의 수립이 이어졌다.
그러나 12월 초순 공주 전투에서 5만여 명의 백성부대는 일군 200여 명, 관군 3000여 명의 연합군에 대패했다. 12월 말쯤에는 전봉준마저 순창에서 체포, 일군에게 넘겨졌다. 체포에서 사망할 때까지 약 4개월간 임의 생명연장은 신이 내린 민중사의 결정(結晶)이었다. 5차에 걸친 재판기록이, 새 권력체제의 기자회견문이, 전녹두가 실려가는 국민사진이 그것이다.
생포된 임이 예상을 깨고 서울의 남산 아래(충무로) 일본 영사관에 구금되자, 어느새 검은 머리 백성들이 산을 이룰(黑山)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원군 자리에 전봉준이 들어선 것. 영사관에서, 병들고 상처 난 죽음 직전의 임에게 일군 최고의 의술이 제공되었고,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제공되었다.
1차 영사관 재판이 끝난 다음날인 3월5일 임은 당시 유력지 동경조일신문 기자와 회견, 새 권력의 핵심인 소수명사의 합의제를 공표했다.
조선의 임금은 상징적으로 왕위만을 유지시키되 왕권을 박탈하여 그것을 소수의 명사에게 위임하는 과두감국(과두집정)체제. 여기에 몇 개월 시행해 왔던 지방의 농민 집강소체제를 결합한 백성권 강화의 권력체계였다.
숭고한 망상일지라도 이 자체는 조선의 전제군주제를 폐지하면서 조선을 유지하는, 파천황의 혁명적인 체제전환이었다. 이는 절망과 분노의 구렁텅이에서 쏘아올린, 백성이 주인되는 ‘됴흔세상’, 그곳을 향해 치켜든 희망의 돛이었다. 분명 전봉준은 이론을 겸비한 위대한 혁명가였다.
벗들아! 이번 8월 나비 같은 녹두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 순창 주막에 모여 한판 벌리자꾸나. 빈대떡에 막걸리로 목청 돋워볼까.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후렴) ‘양이’와 맺은 FTA/ 어찌할까 어찌할까….”
– 제주교대 총장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