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사장 민병석)은 19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언론인 리영희(78) 전 한양대 교수에게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시상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상패문안에서 “분단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화해의 날갯짓을 가르쳐 통일의 비상을 이끌어준 당신은 민족의 참된 선구자였다”며 “모든 우상을 거부하고 오직 진리와 이성의 길만을 추구해 온 당신께 온 겨레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상을 드린다”고 밝혔다.
리 전 교수는 ‘수상소감’에서 “우리 민족에게 막혔던 하늘이 뭔가 트이고 희망의 빛이 비추려는 것 같은 시기에 우리가 와 있다”며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 냉엄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만큼, 지식인들이 안팎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상희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축사에서 “나와 리 선생은 1929년생 동갑 친구”라고 소개한 뒤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이승만·박정희 독재의 엄혹한 세월 속에서도 리 선생은 두터운 상식과 제도교육의 장벽을 뚫고서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이론과 논리를 캐고 들어갔다”며 “이런 뛰어난 사상가가 우리 세대에서 태어난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라고 상찬했다. 안병욱 한겨레통일문화상 심사위원장은 “다시 한번 역사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이 때, 리 선생의 철학과 생애에서 다시금 민족의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봐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내 생전엔 아마도 통일 못보겠지…”
물질과 인간적 가치가 균형 이뤄야 하는데…
미국숭배 만연한 지금은 통일조차 두렵다
“맹자가 이런 얘길 했다. 이룬 공적이나 실력에 어울리지 않게 세상의 얘기거리가 되고 소문이 나는 건 군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 일도 없이 이런 상을 받는다는 건 기쁘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럽고 또 이 나이에는 번거로울 뿐이다. 다만 사회가 인정해 상을 준다니 고마운 일이긴 하다.”
수상소감을 청했더니 리영희(78) 선생은 그렇게 얘기하고 기자의 연필로 취재노트에 직접 ‘성문과정 군자치지(聲聞過情君子恥之)’라고 썼다.
얼굴빛은 여전히 좋았으나 지난해 9월 연희동 아드님 댁에서 뵈었을 때보다 다소 야위었다. “오른쪽 반신 신경마비로 인한 증세를 빼면 비교적 건강하고 소화도 잘 된다. 이빨을 몽땅 다 빼고 수술 중이어서 그렇게 보일 것이다.”
신경마비 때문에 글쓰는 손이 몹시 떨렸다. 여전히 엽서 한 장 정도는 힘겹게 쓸 수 있지만 본격 집필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 했다. 비행기로 몇 시간 정도는 여행할 수 있지만, 많이 걷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건 포기했다.
“사실, 은퇴하고 나면 여행하며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한데 그걸 못하니 몹시 아쉽다. 특히 등산을 못하는 게 유감이다. 예전엔 ‘거시기 산악회’로 좀 이름있는 산들에도 갔는데…. 주말 날씨 좋은 날엔 ‘저 친구들 산에 오르며 소주 까 마시고 있겠지’ 생각하면 내 병이 실감난다.”
생전에 남북통일을 보시겠냐고 했더니 “아마, 나 살아있는 동안엔 안될 것”이라며, 6자회담 2·13합의 이후의 낙관적 분위기를 경계했다. “지금 부시 대통령이 얼굴색깔 좀 바꿨다고 6자회담이 다 잘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오히려 서두르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
남들이 한 쪽으로 몰려갈 때 그는 항상 그 반대편에 섰다. “주류가 아무런 근본적 인식 없이 그냥 거죽만 보고 한 방향으로 쏠릴 때 나는 항상 경계하고 중심을 바짝 다잡도록 경고했다. 나는 항상 비주류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가을 선생의 평생활동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떠돌았다. “그런 얘길 전해 들었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당연한 거다. 시간이 지나면 새 사실이 드러나 수정되고 해석도 달라진다. 영구불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변한 시대상황을 이용해 뭔가 대단한 거라도 새로 발견한 것처럼 주장하는 건 학문하는 자나 언론의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주로 거론된 중국 문화혁명에 대한 시각과 관련해 그는 문혁의 개별 사건들에 대해 시비를 따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권위주의, 비인간적인 경쟁과 계급화한 생활양식이나 제도 등을 평등하고 우애있는 인간적인 관계로 만들어가느냐에 대한 고민을 얘기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이기주의적인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당연시하지만 서로 돕는 우애와 나눔의 사회원리도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 남한 자본주의사회는 그런 사회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중국 문화혁명은 일단 그런 이념을 제시했다. 중국이 최근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는 자본주의사회로 바뀌면서 과거 문혁의 정신, 이념, 가치를 재평가 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 E.H. 카의 얘기도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재미동포 대학생이 저지른 미국 총기 난사사건의 충격도 서구문명의 한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서구문명에 일반적인 측면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사회의 특수성과 연관돼 있다. 며칠 전 신문기사에서 각국 사회만족도를 조사한 결과를 봤는데, 역시 스웨덴 등 북유럽쪽 국가들이 80% 가까이로 가장 높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 물질가치와 인간적 가치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통일도 남북 모두 그런 방향으로 변하는 남북체제의 수렴적 통일방식이 돼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숭배가 만연한 상태에서는 통일조차 두렵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은 결국 더욱 미국화하자는 얘기가 아니냐고 하자,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이미 정치·군사·외교·사상적으로 반식민지나 다름 없다. 에프티에이하면 더 심화될 것이다. 마치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을) 보호국가로 만든 상황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1910년 상황까지 가지 않겠나.” 한마디로 “하라면 하라는대로 다 들어주고” 아첨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어떻게 독립국이며 주권국인가, 어떻게 긍지있는 정부라 할 수 있겠는가.”
끝으로 덧붙였다.
“〈한겨레〉도 한자 넣어 함께 썼으면 좋겠다. 노인들 읽기에 불편하다. 이젠 한글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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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인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운데)가 1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 도중 아내 윤영자씨와 함께 민병석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오른쪽)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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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풍경
“책 읽고 선생님 뜻 배워” 참석한 시민 ‘큰절’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은 분위기가 독특했다. 상을 주는 사람들이 더 영광스러워 하고, 나아가 송구스럽다고까지 했다.
안병욱 심사위원장은 ‘선정 경위’ 발표에서 “그동안 조심스러워서 상을 드리고 싶어도 드릴 방법과 계기를 찾지 못해 말씀을 못 꺼낸 적이 많다”며 “이번에 어렵게 뜻을 전하고 선생님의 응낙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민병석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아마 선생님께서 통일문화에 있어선 공기같고 물같은 분이셨기에 그 막대한 공헌을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기에 이제서야 상을 드리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선각자, 홀로 깨어 있는 이성, 참스승…. 다양한 상찬의 언어들이 발화되는 동안, 늘 우상에 맞서 형형하게 깨어있던 그의 눈도 지그시 잠겼다 떠지곤 했다. 이윽고 상패가 수여되고, 그가 수상소감을 밝히려 단상에 올랐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일어난 뒤로 그의 상징처럼 돼버린 지팡이를 짚은 채였다.
그는 “모두의 말씀이 너무 과찬이어서 퍽이나 부끄럽고 괴로웠다”고 말했다. “학자, 언론인, 지식인, 생활인으로 늘 마음에 두는 맹자의 가르침 ‘성문과정 군자치지’가 떠올랐다”고도 했다. ‘사실보다 지나친 명예를 군자는 부끄러워한다’. 스스로 또 하나의 ‘박제 우상’이 될까 저어하는 그의 마음씀이 장내를 잠시 숙연하게 했다.
그의 발언에 이은 마지막 순서는 기념촬영이었다. 고희범 한국에너지재단 사무총장, 김용태 민예총 이사장,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성유보 동의대 초빙교수, 이봉조 통일연구원장, 이부영 전 의원, 이상희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정태기·서형수 한겨레신문사 전·현 사장, 조정래 소설가 등이 그와 그의 부인 윤영자씨와 더불어 섰다.
퀵서비스 일을 한다는 시민 김승호(52)씨는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김씨는 “책을 통해 선생님의 뜻을 배웠다”며 “사회에 나와 새롭게 나를 태어나게 한 아버님같은 분”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김근태 의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이기범 어린이어깨동무 사무총장 등 100여명의 하객이 19일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리영희(78) 전 한양대 교수의 수상식에 함께 했다.<한겨레신문, 07.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