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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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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기름진 땅도 척박한 땅도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 민들레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운다. 흔히들 우리 겨레가 한반도에 정착한 이래 반만년 이어온 끈질긴 역사를 민들레의 강인한 생명력과 굳은 절개에 비유하기도 한다. 민들레는 땅속 1미터까지 깊이 뿌리를 내려 추운 겨울에도 시들거나 말라죽지 않고 냉해도 거뜬히 이겨낸다. 겨울을 이겨낸 민들레는 새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 바람에 흩날려 강한 생명을 이어간다. 한 세기 전에 이 땅에서 흩날린 민들레 홀씨들이 북국의 언 땅에서도 생명력을 잇고 절개를 지키며 다시 고국 땅에 돌아왔다.
지난 주초 미국에서 귀국하여 막 손전화에 전원을 충전하고 그동안 꺼두었던 전원을 켜자 곧 신호음이 울렸다. 임은 허씨 종친 허벽 씨의 반가운 인사와 초대 지난 3월 17일 저녁 7시, 종로의 한 허름한 한식집에서 열린 임은 허씨 집안 잔치모임은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으로 주민등록증과 정착금을 받은 왕산 막내아들 허국 선생의 손자 허게오르기(62)와 허블라디슬라브(56) 형제가 일본 순사와 밀정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망명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왕산 집안의 망명 유랑생활은 EBS <왕산가의 사람들>, MBC <백년만의 귀향>, SBS <뉴스추적, 항일과 친일, 후손들의 엇갈린 백년> 등 TV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영한 바 있고, <한겨레신문> 등 여러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하였다. 1999년 여름, 필자는 동북 흑룡강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가서 내 고향 출신의 한 순결한 파르티잔을 만났다. 그분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으로 왕산 선생의 당질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그 이듬해 혼자서 그분 희생지인 흑룡강성 경안 청송령을 찾아 그분의 희생비에 한 아름 들꽃을 꺾어 바쳤다. 그 사연이 2002년 7월호 월간 <독립기념관>지에 실리고, 그 기사를 당시 <오마이뉴스> 정운현 편집국장에게 보낸 게 계기가 되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다. 그 뒤에도 10여 차례 허씨 집안 얘기를 오마이뉴스에 추적 보도한 바 있다. 왕산 허위 선생은 경북 구미 임은동 태생으로 평리원장(지금의 대법원장) 관직에 머물다가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왕산이 의병을 일으키자 형 방산 허훈은 3천 두락의 땅을 팔아 군사자금으로 대고, 형 성산 허겸은 아우와 함께 의병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만주로 망명가서는 부민단 초대 단장으로 항일전선에 씨앗을 뿌렸다. 또 사촌 아우 범산 허형, 1908년, 왕산이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일본 통감부를 깨트리고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신식 무기를 당해내지 못해 경기도 연천으로 물러났다. 그 후 이완용이 연천으로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나 내무대신 벼슬로 왕산 선생을 회유했다. 이에 왕산 선생은 심부름 온 이를 크게 꾸짖어 물리치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다 만주로 간 이들 망명객들은 거기서도 한 곳에 정착치 못하고 살기 위해, 일제에 쫓겨 풍찬노숙, 유랑생활을 전전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다시 왕산 가족단 일부는 러시아 땅 연해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곧 이들에게는 여우를 피해 범을 만난 격으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1937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이곳 한인들에 전원 6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불모의 땅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명령이 떨어졌다. 강제 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한인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진행된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졌다. 이주 통보 이후 여행이 중지된 상황에서 거의 맨몸으로 이들은 그곳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한인들의 삶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화물차와 가축 운반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려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한 달여간 달린 끝에 황무지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왕산의 네 아들 중, 세 아들가족도 이들 틈에 끼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돌며 연명해 왔다. 그 새 망명 1세대는 모두 중앙아시아 땅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분들은 자식들에게 조국이 해방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임은 허씨들은 대부분 이름이 외자인데 망명객 2세대부터는 생소한 러시아식으로 일리아, 브로코피, 미론, 게오르기, 블라디슬라브가 되었다. 3세부터는 현지인들과 결혼으로 피부 빛깔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친신만고 끝에 두 형제가 할아버지 나라의 국적을 취득했다. 여기에는 천정배 전 법무장관의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특별배려가 매우 컸다. 백년만에 찾아온 귀한 손님에게 장관이 직접 귀화증을 주고 태극기를 선물했다. 먼저 귀국한 아우 허블라디슬라브는 한 방송인의 주선으로 경기도 안성에 있는 비겐의료기 회사에서 일하고, 형은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이를 딱하게 본 국정원의 주선으로 공주대학 러시아 강좌에 출강하고 있다. 이날 이들 형제는 웃음 띤 얼굴로 축하객에게 소주잔을 돌리기에 바빴다.
친일파 후손은 금배지를 달고 이날 의병선양회 윤우 회장, 이홍환 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부회장, 평화재향군인회 표명렬 대표, 방송인 윤덕호 최상진 PD, 한겨레신문 임인택 기자 등이 이들 형제를 격려하고 축하해 주셨다. 윤우 회장은 "만시지탄은 있지만 의병의 후손을 조국이 받아줘서 대단히 기쁘다"는 격려말씀과 함께 금일봉을 전했다. 이들 형제는 방송인들에게 귀국과 취업에 도움을 준 감사의 뜻을 담은 감사패를 전달했다. 함께 자리를 한 성산 허겸 선생의 손녀 허성숙(48) 씨와 증손 허광석(34) 씨는 매우 부러운 눈으로 이들 형제를 지켜봤는데 이들은 아직 국적을 얻지 못하고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페인팅 등 막일을 하고 있었다. TV 화면으로 이들이 고생하는 장면을 보니까 지난 연말에 만난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푸념이 떠올랐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파 후손은 금배지를 달고 의사당에 드나들고, 독립군 후손은 도배사가 되어 골목을 누빈다"라는. 이날 모임을 주선한 임은 허씨 종친 허벽 씨는 장소도 매우 좁고 누추하며, 음식도 소찬이라고 축하객에게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국적 취득으로 기뻐하는 이들 형제가 이 땅에서 살면서 국적 취득을 후회하는 날이 없기를 바란다. 이들은 이왕이면 할아버지 고향 구미에서 살기를 원하나 고향사람들이 따뜻이 맞아줄지,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라고, 동향인 나에게 속 깊은 사연을 하소연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논의가 한창일 때, 당시 김관용(현, 경북지사) 구미시장에게 그에 앞서 폐허가 된 왕산 생가 터부터 먼저 정비해 한다는 건의서를 드린바 있는데, 그 탓인지 지금 왕산 생가 터는 ‘왕산 기념공원’이 준공 직전에 있고, 마을 앞에는 왕산 기념관을 곧 착공한다고 한다.
일찍이 내 고향 선산 구미는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다. 그 맥을 오로지 이어받은 왕산의 후손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서 100년 만에 고국 땅을 찾았다. 누구보다도 구미시 관계자들이, 구미시민들이 가장 반겨 맞아야 할 귀빈 중의 귀빈이 아닐까? 아마도 구미시가지를 굽어보는 창공의 금오산은 이 모든 일들을 빤히 지켜볼 것이다.<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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