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F 2006] “일제시대 영화는 과거가 아니다”
일제시기 영화 발굴전 기념 세미나 열려
“일제시대 영화 연구를 통해 당시 조선영화가 상당히 액티브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조선 영화와 현재 한국영화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18일 장산 CGV에서 열린 ‘일제시기영화발굴전 회고전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영상자료원 조준형 연구원은 세미나에 앞서 일제 시기 영화들의 현재적 의미를 말머리로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외에서 발굴한 일제시기 영화는 총 7편으로 초기 유성영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1936년 작 <미몽>부터 2차 대전이 격화된 시기인 1945년 작 <조선해협>까지 당시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들이다. 이에 맞춰 1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굴된 7편의 조선영화 회고전이 함께 열린 바 있다. 세미나는 조영정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의 사회와 조준형, 정종화 영상자료원연구원의 발제로 이뤄졌다.
유성영화 출현한 30년대, 한국영화의 역동기
조준형 연구원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영화계:세대교체-기업화-통제체제>란 논문을 통해 “일제시대 영화가 발굴되기 전에는 조선영화사가 상당히 묻혀 있었다”며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 <춘향전>(1935)이 제작된 후 조선영화계는 자본과 기술, 시장면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산업적 역동기를 맞았다”고 소개했다. 무성영화보다 2~3배의 자금이 필요한 영화의 출현은 안정적인 자본을 요구하게 되었고, 유성영화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큰 자본의 영화를 수용할 시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조 연구원은 당시 영화 제작 상황을 설명하며 “새로운 조선영화 기업들이 등장하고 이후 일본의 영화정책이 강압적으로 이뤄지며 점차 어용영화들이 등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영화인들 60년대 르네상스의 주역
조준형 연구원은 일제시대 영화들과 현재의 연결고리에 대해 “1930년대 유성영화와 함께 등장한 엘리트 영화인들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내는 주역으로 활동했다”며 “조선영화사의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이런 영화인들의 친일 행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친일이라는 정치적 논리로 당시 영화사를 폄하하면 풍부한 영화사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3~40년대 조선영화, 새로운 형식의 실험기
“당시 조선영화는 고전적 할리우드와 소비에트 몽타주, 일본영화와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까지 세계영화의 경향이 경합하며 아로새겨진 장이었다.” 정종화 연구원의 논문 <일제 강점기 영화의 스타일연구에 대한 시론>은 일제시대 한국영화들의 스타일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정종화 연구원은 논문 발제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영화는 (제국주의 정부의) 국책의 욕망, 영화 작가들의 욕망 그리고 관객의 욕망들이 다층적으로 겹쳐지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며 “한국영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발굴된 7편을 통해 영화 역사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7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스타일은 장면의 연결”이라며 “35년 <춘향전>에서 보면 앞 장면의 소도구를 이용, 뒷장면을 연결하는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36년 작 <미몽>은 그런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군용열차> 역시 장르 영화의 스타일을 빌리려는 시도 안에 그런 기법들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조선영화 연구, 이제부터
정종화 연구원은 “이번 연구는 발굴된 7편의 스타일 분석을 간략하게 시도하는 시론 정도”라며 “초창기 한국영화의 경향을 분석하는 것은 접근 가능한 텍스트들을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라며 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했다. 조영정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는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발굴 노력이 이제 성과를 내고 있다. 아쉬운 점은 현재 조선의 무성영화가 한 편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계속적인 발굴작업의 필요성을 말한다. 다음 부산영화제에서는 최초의 무성영화전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으로 세미나를 마쳤다.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