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는 친일 과거사청산이 “민족주의적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온갖 부조리의 뿌리로서 ‘질병의 원인치료’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고 밝혔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세력에 의해 처단되었던 역설의 역사가 사회 부조리의 서곡이었다고 본다. 미술계 역시 해방 직후 친일미 술가들이 단죄되지 못하고 되레 화단과 교육계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사 청산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회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면서 “역사문제 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미래를 담보한 현재진행형이기때문에 한국 미술계와 시각문화 내의 친일미술과 일제잔재가 청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90년대 중반, 한국 근대디자인의 형성배경에 대해 연구하던 중 이태호, 최열 등의 친일미술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김민수 교수는 서울대 에게 해직된 뒤 복직투쟁이라는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학자적 자존심과 신념을 한 번도 꺽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김 교수는 2005년 1월 ‘연구실적물에 대한 심사와 관련하여 심사대상의 선정방법에 잘못이 있다고 보여지고, 심사결과의 평가에 있어서도 심사기준을 통 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용을 거부한 것은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하거나 남용한 것으로 위법하다’는 법원의 최종 판결로 2005년 서울미대 교수로 원직복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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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파리해방 후 당시 전국미술가연맹 회장이었던 파블로 피카소가 반역자 숙청재판에 회부해야할 미술인 명단을 파리 경시청과 검찰 에 전달했습니다. 이때 블랙리스트에는 오통 프리즈, 폴 벨몽도, 폴 랑도프스키 등의 유명 미술인들이 포함돼 있었지요.” “숙청위원회가 주목한 화가들 중에는 점령기간 중에 독일여행을 하면서 나치협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 화가와 화상들도 다수 포함되었을 만큼 단호하게 진행됐습니다. 이 결과 1946년 6월 미술가 23명을 친나치부역미술가로 낙인찍음으로써 숙청이 마무리됐습니다.” “그 당시 드골 대통령은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惡)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 겼기 때문’이라는 얘기처럼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는 ‘프랑스에는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한국은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한국문화에서는 거장이 죽으면 작품도 함께 잊혀 집니다.” 검은 웨이브 긴 머리에 친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예술가적인 느낌을 주는 김민수 교수와 얘기를 나눠보았다. 민족과 예술을 사랑하는 김 교수의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 (처음에는 기고를 부탁했으나, 바쁜 일정 때문에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이 인터뷰 기사로 대신하기로 했다.) “판도라의 상자, 친일미술” 친일미술과 일제잔재에 대한 청산은 극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류 사회의 진출과 출세를 위해서는 묵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판도라의 상자 뚜겅을 여는 것은 김 교수가 처했던 지난 고통의 세월처럼 미술계의 ‘왕따’로 전락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83년 ‘계간미술’ 봄호에 자신의 이름을 차마 밝히지 못한 9명의 필자가 공동 이름으로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 이라는 비평문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친일 미술인이었던 월전 장우성과 운보 김기창 화백 등은 일간지 광고지면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계간미술’ 발행인이었던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사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언론이나 잡지에 필자 9명의 글은 청탁하지도 말라고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9인은 김윤수, 문명대, 박용숙, 안 휘준, 이경성, 이구열, 임종국, 정양모, 최순우이다. 김민수 교수는 “그 당시는 친일 미술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무섭고 어두운 시대였다”고 정리했지만 “아쉽게도 그동안 미술계에서는 친일미술의 용어와 개념조차 합의된 적이 없을 만큼 그 엄혹한 시대의 논리가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김 교수는 “명백한 사료를 눈앞에 두고도 친일미술가를 규정하는데 늘 논란이 됐고 친일미술을 ‘일제잔재’ 혹은 ‘식민잔재’라는 말과 뒤섞어 사용하며, 어떤 이들은 특정 양식과 주제만의 문제인양 ‘감각과 기법차원에서 논의하자’고 초점을 흐리게 했다”면서 “이 결과 청산해야할 친일미술의 쓰레 기더미가 거대하게 쌓여만 갔다”고 덧붙였다. “친일미술은 은폐된 채 확대 재생산되어 굳어졌다” 2005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는 해방 60년과 경술국치일을 맞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 1차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했다. 김민수 교수는 이 명 단에 포함된 미술계 친일인사 25명의 명단이 “역사적 자정의 결과지만,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근대미술사가 최열 등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 사전 편찬위원으로 1차 친일인사명단 작성에 함께 참여한 김 교수는 앞으로 “사료발굴과 함께 추가로 밝혀져야 할 미술가들이 아직 많이 있고, 친일미술의 범위를 일제강점기 선전미술 즉 광고 및 도안까지 확대해 연구할 생각”이라며, “문화사적으로 친일미술이 시각문화 전반에 각인시킨 일제잔재, 즉 각종 미의식과 문화적 감수성 등 앞으로 입체적으로 규명해야할 많은 숙제가 남겨져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명단 발표라는 역사적 규명을 넘어서 문화적 차원의 규명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어 김민수 교수는 “한국 미술계에서 친일 청산이 되지 않은 원인에 두 가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첫째는 청산을 가로막는 친일미술인들과 그 후예들이 용어의 초점을 계속 흐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문화예술계처럼 미술계 역시 친일세 력이 해방공간에서 지배구조의 기득권을 장악했습니다. 곧이어 친일미술을 은폐하기 위해 독버섯들이 피기 시작한 것이죠.” “둘째는 친일미술이 ‘일제잔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유전자가 복제되어 일상 삶과 시각문화를 지배할 만큼 자가증식했다는 점입니다. 은폐 된 친일미술은 일제잔재의 형태로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정신과 철학이 부재한 이 복제과정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후진양성과 시각문화를 조장했습니 다. 그러나 빈껍데기 문화보다도 더 큰 폐해는 일제잔재의 형태로 남겨진 미술가들의 반사회 기회주의적인 삶의 가치관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주류 미술가들이 ‘순수미술’의 미명하에 현실문제와 무관한 삶을 살고, 일제에 화필보국한 이유입니다. 독재권력에 아부 해 미술을 환경치장술로 격하시키고, 심지어 친일했던 마음과 손으로 백범, 안중근, 유관순, 논개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동상과 영정을 도맡아 제작해 민족정기 를 능욕했습니다.” “이것은 정신사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정신 나간 화폐 그림들 친일잔재청산, 섬세하고 입체적인 치료가 필요 용어마저도 생경한 미술계에서의 친일미술과 일제잔재란 무엇일까. 김민수 교수에 따르면 이렇다. 친일미술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제의 침략주의와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시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미술단체와 시책 선전을 위한 미술품 제작, 저작 및 교화했던 했던 친일부역행위의 적극성, 반복성, 자발성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는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에 단순히 붓을 들 었다고 모두가 친일미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반복해서’ 부역행위에 앞장섰던 미술가만을 친일미술가로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일제잔재란 청산되지 않은 친일 미술의 결과물이 한국 미술계에 남겨준 산물로써, 친일 미술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친일 미술의 싹 을 가지고 있는 미술계의 제도적 습성, 미학적 태도, 형식과 기법 등을 총망라한 것이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한국은행이 최근 화폐를 교체한다면서 대표적인 친 일미술가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초상화나 천원권의 현초 이유태가 그린 퇴계 이황 그림를 교체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나라의 얼굴인 한국 화 폐 속의 역사인물들이 하나같이 존재감을 상실하고 있어 한마디로 정신 나간 그림들”이라며, 이는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화폐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 다”고 했다. 김민수 교수가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화폐의 문제는 이렇다. “중국이나 일본은 화폐속의 역사인물들을 일본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기여했던 주요인물로 모델로 삼았는데, 화폐 속 인물의 묘사가 사진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적 신뢰감을 전달하죠. 예컨대 중국 위안화의 경우, 마오쩌둥과 소수민족의 인 물들을 실제 사진이미지에 기초했기 때문에 사실성을 높였고, 일본의 엔화 만엔권엔 19세기말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계몽가이자 게이오의숙 설립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 오천엔권엔 19세기말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천엔권엔 근대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사진과 같은 그림이 들어있죠. 중국과 일본의 이 화폐들은 화 폐가 지니는 국가적 상징성을 담아낸 역사적 인물들을 화폐에 담았고, 그 표현도 신뢰감이 생기게끔 사실성이 뛰어납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신뢰감이 떨어질 뿐 만 아니라 심지어 대표적인 친일화가가 영정을 그려 화폐의 상징성을 훼손시키고, 우습게도 자신의 얼굴을 심하게 그려 넣은 천원권의 퇴계 이황 그림의 코메디 도 있죠.” 화폐 문제에서도 드러나듯, 그 원인에 대해 김민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학맥 인맥 중심의 미술계는 자신의 이익만을 집단적으로 보호하는 파벌형성에 주력한 못된 전통을 세습시켰다”면서 “이는 천황제 가족주의 파시즘으로부터 학습한 일제잔재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또 “이때 ‘순수’미술 이란 온갖 속세의 죄를 스스로 씻기 위한 ‘면죄부’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도 진단했다. 그러면서 김민수 교수는 “미술계에서의 친일문제는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기에 온갖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새오천원권에 그려져 있는 율곡 이이의 얼굴이 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김 교수는 “이런 업보로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는 ‘친일미술’과 ‘일제잔재’를, 병원으로 치면, 두 개의 수술방에서 동시에 치료해야만 하는 이 중의 업보가 남겨져 있다”면서 “친일미술이라는 근본적인 종양을 제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잔재로 생긴 여러 합병증을 입체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강 조했다. 보다 섬세한 치료가 강구되어야한다는 뜻이다.<민중의소리, 06.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