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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 정철용 선생 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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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정철용씨(오른쪽)가 강만길 위원장의 손을 잡고 격려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던 정철용 선생(80)이 현재 지병 악화로 서울아산병원에 2주 넘게 입원 중이다. 선생은 전립선염으로 하반신이 심하게 부어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식사와 의사 소통도 어려운 지경이다. 반민특위 당시 중앙사무국 제2조사부(문화·교육부문)에서 활동하면서 1949년 2월 7일 대표적인 친일 문인 춘원 이광수를 직접 체포하기도 했다. 1949년 6월 6일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친일 경찰들에 의해 반민특위가 불법적으로 습격 당한 현장에서 고초를 당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반민특위 해체 이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반공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선생은 반민특위 요원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긴 채 살아와야 했다.


올 5월 31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판식에 초대된 선생은 남다른 감회에 졌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반민특위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이다. 이를 위해 우리 연구소는 지난 2월 김원기 국회의장과 오영교 행정자치부 장관 앞으로 반민특위 명예회복 조치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바 있다. 1949년 당시 반민특위는 제헌의회 소속 기관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17대 국회가 명예회복의 조치를 취해야 할 주체이다. 또한 당시 반민특위를 습격한 기관은 당시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중부경찰서 소속 경찰들이었으므로 오늘날 행정자치부와 경찰청이 공식 사과의 각 당사자가 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국회에서는 우리 연구소가 보낸 공문에 대해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송부했다는 회신 뿐 이며 행정자치위원회에서는 아직도 회신도 없다. 또한 행정자치부는 아예 회신조차 없는 상황이다.


정철용 선생은 반민특위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지난 해 9월 오마이뉴스에 <나는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다>는 제목으로 자신의 ‘회고록’ 일부를 6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으며, 우리 연구소를 통해 기존 원고를 보완하여 정식 출판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작년 11월 경찰청은 경찰력의 위법 부당한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통해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며 국민 화해와 통합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러면서 ‘민청학련 사건’ 등 10대 조사대상 사건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제외되었다. 반민특위 불법 습격 사건이야말로 대한민국 건국이후 경찰에 의한 부당한 공권력 행사의 시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반드시 조사대상에 추가되어야 하며 더불어 정철용 선생의 생전에 반민특위에 대한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뤄지길 기대한다.


다음은 지난 9월 정철용 선생의 회고록 일부를 연재할 당시 오마이뉴스 정운현(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편집국장의 편집자 후기이다. 그 역시 반민특위 활동 ‘공적을 재평가하고 그에 걸맞는 국가차원의 포상’을 요구하고 있다.


[편집자 후기] 역사의 뒤안길에 내팽개쳐진 ‘민족정기 지킴이’
반민특위 관계자들 공적 재평가 및 정부 포상 실시해야


<오마이뉴스>는 지난달 초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 선생의 자전적 회고록을 단독입수, 이를 총 6회에 걸쳐 연재했다. 정 선생의 글은 반민특위 당시를 증언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본다.


반민특위에 관계했던 조사위원, 검찰관, 재판관, 조사관, 서기, 특경대원 등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거의 없다. 정 선생을 비롯해 심윤 (경남 조사부 근무, 82, 서울 거주) 등 몇 사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지난 2002년 여름 반민특위 총무과장을 지낸 이원용 선생이 타계하는 등 근년에 대개 고인이 되었다.


편집자는 지난 90년대 중반 반민특위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아 <증언 반민특위>를 출간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만난 반민특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을 토로했다.


한 예로 특위 해체 당시 정부는 특위에서 활동할 당시의 신분에 걸맞는 직장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이후 아무런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대부분 실업자로 전락해 어려운 생활을 했다. 특히 더러는 친일파들의 중상모략으로 빨갱이로 몰려 도피, 은신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정철용 선생의 경우 반민특위에 들어오기 전 신한공사 대전지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은 알고 지내는 국회의원의 권유 및 추천으로 신한공사를 그만두고 반민특위로 일자리를 옮겼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비슷한 경우다.


반민특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 가운데 대부분은 반민특위를 직장이라는 개념보다는 반민특위 활동을 통해 신생 대한민국의 국기를 바로잡고 민족 정통성을 세우는 일에 더큰 의미와 보람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반민특위 와해로 그 유종의 미를 거두진 못했다.


1949년 8월말로 반민특위가 문 닫은 이후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금기시 돼 왔고, 반민특위에 관계했던 인사들 역시 기피인물 비슷하게 여겨져 왔다. 그간 그들의 특위에서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나 보상문제가 단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다.


반민특위가 해체된지 55년이 지난 지금 17대 국회에서는 친일청산 문제로 논의가 뜨겁게 진행중이다. 조만간 특별법에 의거, 제2의 반민특위가 꾸려질 전망이다. 이제라도 55년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공적을 재평가하고 그에 걸맞는 국가차원의 포상이 마땅히 이뤄져야할 것이다. / 정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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