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부 > 학교에 ‘해방군’이 ‘진출’하다? – 일제와 미군정의 유산
EBS 공사창립 5주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오늘날 교육 문제의 핵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제와 해방 이후 교육 정책 결정 과정의 오류와 왜곡에 대해 주제별로 접근해 본다.
< 제2부 내용 >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사람들은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인천항으로 몰려든 자리에서 독립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권평근씨가 ‘미군 보호’를 위해 나선 일본 경찰에 피살된다.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군은 일본사령부로부터 한국은 좌익이 우글대는 ‘위험한 지역’으로 보고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미국은 미군정 예비보고서에서 이미 ‘교육과 농업 등의 분야에서는 과거 일본에 협조했던 사람들을 그대로 두어도 해방 이후 조선 민중들의 반발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지울 수 없는 친일경력을 가진 교육계인사들, 특히 미국유학파 출신들에겐 나락에서 권력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미군정 학무담당(락카드 대위)은 김활란. 백낙준. 오천석. 김성수 등을 불렀고 곧 이들을 핵심으로 한 ‘한국교육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후 각도의 학무국장은 물론, 읍면의 학교교장까지도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광복 이후 숨죽이던 친일 교사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최근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는데 일조했다는 주장으로 온국민의 분노를 터뜨린 서울대 이영훈 교수,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가 단적인 예다. 아직도 일본의 ‘침략’을 ‘진출’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은 광복 60년을 뼈아프게 돌아봐야 할 이유다.
해방 이후 교육계에는 어떤 철학으로 가르칠 것인가를 중요시한 좌익진영, 무슨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하던 민족주의 진영, 어떤 방법으로 가르칠 것인지 교육방법에 골몰했던 미국유학파 지식인 진영, 세가지 세력이 있었다. 그 중 정책결정에 주도권을 확보한 것은 미국유학파들이었다. 그들은 친일, 또는 부일경험을 피할 수 없는 계층이었고 미국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재생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교육계를 장악한 지 60년- 우리 교육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왜 대학생들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학내친일 청산을 외쳐야 하는가? * 왜 우리나라 대학에는 2000년대가 되도록 현대사 전공교수가 없었는가? * 왜 우리는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와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야 했는가? * 왜 우리는 어린시절 위인으로 배운 사람을 민족반역자로 만나야 하는가? * 왜 우리는 반쪽짜리 역사와 철학을 배워야 했는가?
미군정 당시의 자료와 교육계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퍼즐을 꿰맞추어 본다. 우리 교육계에 쌓여온 문제들과 그 연원을 방송사상 최초로 차근차근 밝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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