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생떼 부리기는 무릇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늘에 이르러 그 정도가 몽니를 넘어 망령의 수준에 달하고 있다.
일본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새역모)’이 교과서 개정판에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온갖 사실을 은폐왜곡날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극우단체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역사교과서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일관계의 파워폴리틱스의 역사이자 국가정체성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단면이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망령을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제 나름의 규율과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마을에 어느날 총칼든 강도들이 난입해 부녀자를 겁탈하고 촌장을 살해하고 모든 생산물을 강탈하고 심지어 말과글까지 빼앗아 갔다. 총칼이 없는 부락민은 피울음을 삼키면서 그저 지켜보았다. 그 세월이 길어지자 강도에 협력하여 이득을 챙기는 자들이 늘어났다. 36년 후에 강도집단이 패퇴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강도가 물러간 자리에 그들과 야합해서 마을을 수탈하던 집단이 촌장의 무리를 형성했다. 그들은 마을의 우두머리가 되었을뿐만 마을의 문화와 혼을 전수하는 교과서에 강도와 야합한 자들의 글을 버젓이 싣고 가르쳤다. 비록 일시적으로 패퇴했지만 강도근성을 가진 자들은 한때 지배했던 마을을 의기양양하게 내려다 볼 수 밖에.
대한민국은 일제 황군 소위 ‘다까끼 마사오’가 통치했다. ‘메이지 유신’을 흉내낸 ‘10월유신’이라는 통치술은 파시즘 분파인 군국주의의 한 방식이었다.
1979년 10, 26일 그가 충복에 의해 시해당하자 바다건너 강도의 후예는 비장한 조사를 읊었다 ‘대일본제국의 마지막 황군이 서거하셨다’고. 그러니 그들은 침략전쟁을 청국과 러시아에 맞선 자위전쟁으로, 모든 학살과 강탈을 없었던 일로, 오히려 가난하고 무지한 후진국에게 근대화의 축복을 벼락처럼 내려준 것으로 서슴없이 기록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이 ‘새역모’의 식민지미화에 분노하고 성토하고 있다.심지어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댓가로 부귀영달을 누린 자칭 ‘민족언론’지도 마지못해 합류하고 있다.
외교부도 범정부차원의 대책기구를 구상하는 모양이다. 광복 60주년이 되는 새봄에 이 ‘끝나지 않은 치욕’이 새삼 부끄럽다. 강도근성을 가진 자들이 늘 그러는 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문제는 세계10위권의 경제강국반열에 선 우리들이 왜 이런 반복되는 수모를 겪어야하는가에 있다.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를 달성한 경이로운 역사를 성취한 우리들이 왜 어째서 아직도 끊임없이 도발하는 제국의 망령에 시달려야 하는가.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도 막상 제 눈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이것이 대한민국의 미숙아, 발달장애 증세이다. ‘새역모’를 이구동성으로 비난하기 전에 제2의 한승조, 제3의 지만원류가 설치고 있는 현실을 보자. 망령난 한승조가 버젓이 ‘민족고대’(죄송합니다. 나는 고대에서 한승조에게 정치학개론 한강의 수강했습니다)교수를 지내고 명예교수에 훈장까지 탄다.
적색독재를 사모하는 주사파였다가 우익하는게 무슨 훈장이나되는 듯이 ‘자유’의 이름을 욕보이는 ‘자유시민연대’라고 이름하여 ‘민족언론’의 옹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 씨부리고 있는 한승조변호를 직시해 보라.
거기다가 법원은 어떤가. 매국의 댓가로 할애비가 천문학적으로 챙긴 땅을 찾겠노라고 친일후손들이 ‘내 땅 돌리 도’하고 소송제기하면 법률적으로 아무 하자없으니 그 장물을 돌려주란다. 판사의 사전에는 ‘사회정의’니 ‘공동선’이니 ‘민족정기’니 하는 말이 없단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법리’와 ‘법적 안정성’만이 진리이란다. 그러니 퇴임하는 헌재 재판관께서는 퇴임의 변으로 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헌재에 진입하는 일은 나라사랑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대한민국은 이른바 법기능인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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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사 간 친일문학선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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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판과 교육은 어떤가. 전두환 몰아내자면서 학생들을 선동한 죄로 해직당하기 전까지 나는 1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방후 80년대까지 국어교과서에는 가장 모범적인 글로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노천명, 유진오의 글로 채워져 있었다.
학생들은 ‘사슴’ ‘국화옆에서’와 같은 소위 ‘순수시’에 마취되었다. 글솜씨 하나로만 보면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광복 40주년 되던 해인 1985년에 매우 불온한 책이 출간되었다. 전두환이 폐간시켜버린 ‘실천문학사’가 ‘친일문학작품집’ 두권을 내놓은 것이다.
아무 해설없이 그저 우리문학사에 내로라하는 이름을 지닌 이들이 쓴 글을 묶어 놓았다. 그것은 쓰나미처럼 일시에 문학인들을 덮쳤다. 대저 문학하는 행위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계기를 주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는 참담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문학적 자산의 대부분 문인의 ‘극악한’ 친일행적 앞에 젊은 문인들은 새삼 글쓰는 행위의 엄숙함을 되새겼다. 그리고 너무나 괴로워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 헤매다가 결론에 이르렀다.
춘원과 미당은 천부의 문인이요 시인이다. 당시의 국제정세에 어두워 일제가 향후 백년은 더 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반민족적 범죄를 직시하되, 그러나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것은 민족의 업보요, 우리의 지독한 상처이다.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제법 성숙한 이 결론은, 그러나 서정주가 86년에 전두환에게 바친 ‘단군 이래 가장 인자하신 미소’라는 헌시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재의 ‘조선혁명선언’, 박은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 만해, 육사, 윤동주들에게 우리의 사뭇 자기위안적인 철부지 결론을 준열히 뉘우쳤다.
너무 참담해서 ‘친일문학선’에 실린 이름과 작품을 열거할 용기가 없으니 네티즌 여러분은 한번 일독해 보기 바란다. 그들중 일부는 유신과 5공을 거치면서 박정희가 지명하는 유정회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으며 대부분 문교부 발간 국어교과서에 오래도록 작품이 실렸다.
나는 중 ·고등학생때 그 교과서로 배워 친일의 거두인 춘원을 문학의 귀감으로 알았으며 적어도 85년 이전까지는 또한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서정주의 친일과 독재찬양을 비판하는 고은 시인을 향해 한국문단의 주류로 자처하는 집단은 아직도 고은을 향해 ‘스승의 무덤에 칼을 꽂는’ 패륜아로 욕하고 있다.
피끓는 젊은이들의 무수한 희생과 국민들의 값진 자각으로 우리 사회가 이만큼 민주주의 성숙기에 이른 이즈음에도 친일과 과거사를 규명해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고자하는 입법적 노력을 야당총재죽이기로 규정하고 불법점거농성을 일삼으니 이런 모습의 대한민국을 강도 일제의 후손들이 어찌 얕보지 않을쏘냐.
고장난명(孤掌難鳴)이다. 손바닥은 홀로 울지 않는다. 반드시 두 손이 부딪쳐야 소리난다. 일본의 ‘새역모’와 이들의 정관계 서포터즈는 한국의 한승조 조갑제 신지호류와 맞붙어야 일을 도모한다. 그들은 국적과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는 끈끈한 동지애를 가진 집단이다, 사뭇 사해동포주의적이며 글로우벌한 최신버젼이다.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를 위해 철저한 황국신민에의 길’을 호소한 이광수는 여러분 네티즌 연령의 청년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세계의 낙원, 이상향 신앙과 윤리와 예술의 원천 그러한 아세아를 세우려고 맹수 독충을 몰아내는 성전. 일본남아의 끓는 피로 부름받은 그대,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특별지원병을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그렇게 파시스트의 소모품이 되어 그들의 총알받이로 전사한 청년의 주검 위에 서정주는 이렇게 노래한다.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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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대원의 푸른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 왔느니 너로하여 향기로운 삼천리 산천이여
일제의 흉악무도한 마수로부터 해방된지 60년. 아직 대한민국에는 이들 친일문인의 이름을 빛내는 문학상이 최고의 영예로 되어있다.
문학과 삶이 별개라면 , ‘문학적 재능이 삶의 크나큰 흠결을 덮고도 남는다면’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최고액수에 최고영광이라면 만약에 이후에 우리가 다시 그러한 위기에 처할 때 어느 예술가가 민족의 공동이익을 생각할 것이며, 어느 젊은이가 공동체에 우선해 자신을 희생할 것인가.
이순신도 유관순도 박종철도 우리 역사에서는 다시 탄생하지 않을것이다.
노망난 어르신과 적색독재와 백색독재를 차례로 흠모하는 철부지들의 환상적 콤비가 발행부수최고를 자랑하는 언론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한에는.
일본의 몽니를 비난하고 저주하기 전에 먼저 ‘제 눈안의 들보’를 들여다 보자.실로 우리 눈 안의 들보는 수정체보다 크고 험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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