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경계를 따라’ 가는 역사 기행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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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경계를 따라’ 가는 역사 기행을 다녀와서

배지원 후원회원

이번 여행으로 나를 이끈 건 여러 해 전에 마주친 한 장의 작디작은 흑백사진이었다. 시인 백석이생활했다는 단둥 압록강 일대의 사진엔 시인이 파 한 다발을 늘어뜨리고 걸었다는 압록강 철교도 보였는데, 너무 작아 어찌나 감질나던지. 조중(朝中) 경계를 따라간다는 담대한 여행 코스도 참을 수 없으리만큼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구나 다롄에서 출발해 투먼에서 끝나는 전체 일정의 딱 중간에 절정을 치는 백두산 천지 감상은 요즘 말로 여행의 ‘킥’이 될 터였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려면 여기저기 양해를 구해야 하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그보다 더 고민이 컸던 건 백두산만은 우리 땅을 밟으며 함께 오르자던 오랜 벗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우리 젊은 날의 진지했던 약속이 생생하건만, 나는 기어이 혼자라도 가보겠다는 욕구를 억누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휴전선 거친 철책이 담담했고, 통일이나 민족 같은 단어들은 입속에서만 맴돌다 시들어간 지 오래였지만. ‘그래, 그 영산 앞에 서서 죽비를 맞든 면죄부를 찾든 가보는 거다’.

주관사 ‘후라’ 대표님 등 서른세 명의 여행자가 공항에 집결했다. 중학생부터 여든이 넘으신 원로까지 우리를 실은 비행기는 무사히 다롄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난 이미 첫 방문지인 뤼순 감옥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국경을 넘는 것부터 큰 난관이었다. 공안들은 후라가 만든 여행 안내서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일행의 소지품에서 ‘미국인’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가져가는가 하면, 왜 좋은 길 두고 국경 길로 가냐고 묻기도 했다. 항일 유적지 방문도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선하디선한 사람들이란 걸 얼굴만 봐도 단박 알 텐데, 경계를 따라가는 여행은 경계 대상인 듯했다.

진지한 여행자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한중(韓中) 간의 미묘한 기류를 몸소 체험하고, 드디어 당도한 뤼순 감옥. 붉은 벽돌, 파놉티콘 구조 등이 서대문형무소와 닮았지만, 규모는 훨씬 컸고 징벌방은 더 살벌해 보였다. 안중근 의사의 독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순국하신 사형장 지하에는 시신 수습실이 없어 보여 이해 불가한 구조였다. 여기서 병사하신 신채호 선생과 고문사하신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전시관까지 차려준 정성은 고마웠다. 밖으로 나와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둥산포(東山坡)’라는 야산을 어렵사리 가늠하고 야트막한 능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유해 발굴과 봉환에 중국도 곧 나서주겠지, 생각하다 홀연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안 의사가 돌아가 묻히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나고 자란 황해도 해주일까, 김구 선생이 마련해둔 서울 효창공원의 가묘일까? 아니면, 대전 현충원일까?

함께한 김진향 박사는 며칠 뒤 윤동주 생가에 가는 길에 윤 시인이나 홍범도 장군 같은 애국지사들의 당시 국적을 말하면서, 만약 이분들이 살아있다면 분단된 나라를 보는 심정이 어떨 것 같을지 우리에게 되묻기도 했다. 무거운 물음표를 달고 5시간 반이나 단둥을 향해 달렸다. 청승을 좀 보탠 홀로 여행을 가끔 하는 나는 버스의 맨 뒷자리 구석 창가를 가로채듯이 차지하고 앉았다. 두 칸씩 띄어 앉은 황선우 선생님과 김현준 선생님은 마치 금단의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 같은 상기된 표정으로 앞으로 갈 곳들에 관해 정보와 경험을 적절히 섞어 내게 소소한 예습을 시켜주셨다. 알고 보니, 가족과 친척이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조선에 사셨거나 살고 계신 분들이었다.

청승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여행 내내 옛날이야기를 안주로 고량주 향기가 그득한 뒷자리에 머물렀다. 어느새 나도 그 향기에 취했던 걸까. 점점 내가 떠나온 곳이 꿈 같아지고, 백석이나 홍범도, 윤동주 그런 이름들이 갈수록 또렷한 얼굴로 내 곁에 머무는 것 같았다. 다음날, 여우비를 맞으며 걸었던 압록강 철교는 웅장하고 차가웠다. 강 건너 북녘땅 신의주는 어색하고 신비로웠다. 1942년부터 시 한 줄 쓰지 못하고 세관원으로 일했던 유랑시인 백석이 터벅터벅 거닐었고, 1950년에는 중국 의용군이 야밤을 타고 한반도로 넘어갔던 절단된 철교 끝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북적였다. 발밑에는 철근 틈새로 흙탕이 된 강물이 적막하게 흘렀다.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이회영 일가가, 이육사와 김좌진이, 수탈과 기근을 벗어나려 했던 가난하고 쫓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건너갔던 그 강이 거기에 있었다.

묵었던 달섬을 새벽에라도 산책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이 기다리는 지안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가파른 999개 계단을 올라 고구려의 졸본성 터를 보고, 환상적인 환룡호를 내려다봤다. 다들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일정표에는 졸본성 대신 ‘환인 오녀산성’이라 쓰여 있었는데, 만주족의 설화에서 따온 명칭이라 했다. 내게 압권은 광개토대왕비였다. 숨 쉬는 듯한 7m가량의 돌 위에 ‘태왕’이란 한자를 발견했을 땐, 나 혼자 감격했다.

완만한 구릉을 올라가니 아늑한 명당자리에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운 장수왕릉이 있었다. 나는 무덤을 좋아하는 타포필리아다. 왕릉을 매만지며 탑돌이 하듯 돌자 이국에서 이런저런 사흘간의 긴장이 녹아내렸다. 각진 화강암으로 만든 무덤이지만 포근했다. 다만, 내 코앞에서 장수왕처럼 건장한 청년이 말벌의 집중 공격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주 가끔 여행의 감흥을 돌멩이에 묻혀오는 나쁜 습관이 있는 나는 이때도 장수왕릉의 딸린무덤에서 떨어진 손톱만 한 돌멩이를 주워서 지니고 다녔는데, 참혹하게 부어오른 청년의 다리를 볼 때마다 이 돌멩이를 건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다 고민 끝에 그 돌멩이를 주고 말았다. 너무 기뻐해 줘서 내가 더 고마웠다.

2천 년 넘은 산성을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자 버스는 어느새 자강도 만포시를 우측에 끼고 달리고 있었다. 압록강은 부쩍 좁아졌고, 최근에 설치되었다는 철책이 사나웠다. 철로가 보였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보였다. ‘항미원조 제1도’ 붉은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적힌 건물 앞에서 유람선을 타고 북측 풍경을 돌아다봤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아버지와 걸으며 다정하게 얘기하는 꼬마, 망루 밖에서 책 같은 걸 읽는 남자. 이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니 그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산에 나무는 적었지만, 산비탈 뙈기밭과 옹기종기 집들이 단정했다. 제비를 닮은 앙증맞은 물새들이 이쪽저쪽 우리를 놀리듯 경쾌하게 날아다녔다. 나 살아생전 저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 예전엔 사람들이 장사하러, 제사를 지내러 이 강을 자유롭게 다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안부도 물었다고 한다. 선상에서 누군가 ‘아, 착잡하네요’라고 했다.

백두산 남파 입구가 있는 창바이현으로 가는 길은 비가 내렸던 것 같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좀 운 것 같기도 하다. 잊고 지냈던 재일동포들의 얼굴이 빗방울에 하나둘 맺혔다.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갈라져서…’ 엉엉 울던 덩치 큰 아저씨가 생각났고, ‘남조선을 조국이라 불러도 되겠죠?’라며 조심스레 물어왔던 고인이 되신 1세 어르신도 생각났다. ‘내가 고물 주워 살면서도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라고 맨날 시위에 나갔어’라던 우토로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고, 날조된 국가보안법 사건에 휘말려서 ‘남북이 분단돼서 나도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라며 어렵게 적응한 한국을 다시 떠났던 친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묵직하게 아파오는 가슴을 누른 채 그들의 인생을 생각했다. ‘창바이현 숙소가 불편해도 좀 참으셔야 해요, 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는 현지 재중동포 가이드의 함경도 사투리에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창밖의 이국적인 풍광은 갈수록 거칠고 광활해지고 있었다.

김 선생님은 ‘내일 천지 못 보겠는데’라며 안쓰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셨다. 그러나 백두산의 큰 뜻을 누가 알리오. 량강도 혜산시와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 일부가 보이는 강변을 지날 때만 해도 날씨는 구릿했지만, 백두산 입구에 도착해 셔틀버스를 타니 요술을 부린 듯 하늘이 쾌청했다. 어디 그뿐인가. 산기슭을 돌면서 만났던 알록달록 들꽃들은 하도 오밀조밀하고 다정해서 내심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백두산의 어여쁜 치맛자락 위에 잠시 내려앉아 만져도 보고 향기도 맡아보고 싶었지만, 셔틀은 가차없이 천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백두산 천지!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비경 앞에서 절로 오른손바닥이 심장 위에 얹혔다. 깊고 짙은 군청색 호수가 하늘마저 머금고 순박하고 투박한 조물주의 손바닥 위에 담겨 있었다. 물결은 때때로 깊고 느리게 일렁였는데, 세상만사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내 얼굴 위에 인간이 그어놓은 국경선 따위도 부질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뒤돌아 삼수갑산 방향으로 몸을 틀어보니 백두산의 주름진 치마가 불규칙한 리듬을 타며 멀리멀리 뻗어 있었다. 백석 그대는 이 구릉이 닿는 삼수갑산 개마고원 위에서 양치기하며 김을 매며 여생을 보냈던 건가. 그만 천지를 덮을 시간이라는 듯 삼수 쪽에서 커다란 구름이 시시각각 몰려왔다. 혹여, 가난한 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해서 보내는 구름 편지인가. 발밑에 핀 ‘두메양귀비’가 하늘하늘한 연노랑 꽃잎을 흔들며 바람을 버티고 있었다. 두 나라의 철책 사이 부석토 벌판 한가운데도 작은 자줏빛 꽃무지가 당차게 피어 있었다. 철책을 따라 핀 ‘구름국화’, ‘호범꼬리’, ‘두메자운’을 눈에 넣었다. 남도, 북도 함께 부를 수 있는 이름들이 아직, 여기 많이 남아 있었다.

돌아온 숙소 로비에서 방 열쇠를 기다리는 순간까지도 나는 두메양귀비에라도 빙의된 것마냥 정신이 하늘하늘했다. 그런 내게 문득 원로 소설가께서 다가와 작은 시집을 건네주셨는데, 온몸이 녹작지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분은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걸 아실 리 없어 그 우연에 다시 한번 감동하며 방에 들자마자 시들을 읽어내려갔다. 그날 저녁 산책길에서 야생화에 둘러싸인 백두산 그림엽서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어설픈 시를 써서 다음날 그분께 드렸다. 지금 꺼내 보니 제목도 달지 않은, 결국 내 청승에 취해 쓴 부끄러운 글이지만, 감사한 마음만은 고스란히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여름이 무르익는 어느 날 / 난생처음 올라보는 백두산
알프스에서도 본 적 없는 들꽃들이 / 서럽고 반갑게 흔들릴 때마다
알알이 떠오르는 옛사람들의 숨결들 / 하늘마저 품은 웅숭깊은 천지 앞에
헤쳐진 마음은 버겁기만 한데 / 숙소로 돌아와 열쇠를 기다릴 때도
하늘하늘 마음은 떨려오기만 한데 / 문득 검보랏빛 총총한 두 눈빛이
곰익은 들쭉이 콕 박힌 두 눈빛이 / 건네준 한 권의 작은 시집─.
나는 어느새 다시 백두산 들꽃잎 / 이름 없는 노란나비로 날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모든 여정을 담지 못한 기행문이 되고 말았다. 기억과 사실에 오류도 있을 줄 안다. 실은 뇌리에 박힌 더 많은 풍경과 냄새와 말들과 노래가 있었지만, 무감각한 일상에 허우적거릴 때마다 이따금 귀하게 꺼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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