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27]
한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 가곡의 배반 :
〈선구자〉와 조두남
이명숙 연구실장
함축적 시어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문학적 표현 외에 시대적 배경, 작가가 처한 상황들이 그 기저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설이나 의미 부여가 이뤄지기도 한다. 대중을 사로잡은 시어들은 곧잘 아름다운 선율에 실린다. 노래는 시어의 감성을 증폭시키며 더욱 폭넓게 전파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노래들은 그들을 하나로 포용하는 힘을 가졌다. 시대적 상황과 요구에 따라 항일투쟁의 바탕이 되기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의지가 되기도, 민주화 투쟁의 힘이 되기도 했다.

조두남(趙斗南, 1912~1984)이 작곡한 <선구자(先驅者)>는 한때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노래였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갖은 핍박과 설움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희망을 품었던 ‘선구자’를 표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제 시기 만주에서 작곡했던 것을, 해방 직후 가사 일부를 시대에 맞게 수정했다고 했다. 1947년과 1949년에 출간한 가곡집은 현재 온라인 상에서 원문이나 목차를 제공하고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고, 세 번째인 1962년 발간 가곡집 『분수(噴水)』에서 8번 곡 <선구자>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두남의 가곡집, 가곡 음반, 수상집 등에 꾸준히 수록되어 있다.
<선구자>가 전 국민에게 알려진 계기는 1963년 연말,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한 서울시립교향악단 송년음악회에서 공연되면서부터다. 이날 공연 음원을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 7년간 시그널 뮤직으로 쓰면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의 하나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데모’ 학생들의 애창곡이기도 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규모 시위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거리에 울려 퍼졌다. 통일운동의 ‘선구자’였던 문익환 목사가 1989년 방북 과정에서 만찬 등 행사 중에도 불렀다.
해방 후 한국 음악계의 과제와 현실
시대 상황이 급변하면 과거 창작됐던 작품들을 일부 수정해 새로운 시대에 맞게 내놓기도 한다. 1945년 해방 직후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과거 발표한 노래의 가사를 일부 고쳐 내놓았다. 조두남의 <선구자>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제목과 가사 일부를 수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 시기 항일노래들 상당수가 원곡의 가사를 바꿔 부르는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였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다만 과거 친일가요, 군국가요를 가사만 바꾼 경우도 많아서 혹자는 ‘8월 16일 독립운동하는 격’이라는 우스갯말이 나오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과 새 국가 건설의 희망을 담은 노래들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상당량이 배출되었던 배경이다. 하지만 친일 행적을 ‘갈아 끼우기’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해방 직후 전 사회적으로 식민유산 극복이 가장 시급했고, 음악 분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했고, 다음으로 새로운 민족음악을 세워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많은 음악가, 평론가들이 당시의 현황 분석에 기반해 각종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들 상당수는 기존 음악계의 기득권자였고, 그래서 대부분 친일 인사들이기도 했다. 일제 시기 친일음악단체로 손꼽혔던 ‘조선음악협회’와 ‘경성후생악단’을 비판하며, 여기에서 핵심 인사로 활약했던 친일 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공간은 짧았고, 남북 각각에 정권이 수립되며 좌우 이념적 대립이 극에 치달아 6·25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초래했다. 이에 편승한 친일 음악인들은 한국 사회의 음악계 중진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조두남, 민족적 정서를 담은 가곡을 창작하다
1912년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며 일찍부터 서양 음악을 접하고 신부에게 음악교육도 받았다.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에 특히 재능이 있었고, 기독교 선교사의 주선으로 여러 교회 부흥회 등 무대에서 연주와 공연을 했다. 평양의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32년경 만주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본의 간섭이 적은 만주로 무작정 떠났다 한다. 봉천(奉天)과 하얼빈(哈爾濱)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무단장시(牧丹江市)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곡·작사 등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음악 개인지도를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김소월(金素月)의 시 <접동새> <그리움> <산> <제비> <새타령> <고향> 등에 곡을 붙여 발표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고향 평양으로 돌아왔다가 1946년 초 서울로 이주해 정착했다. 이때 만주에서 작곡한 곡들을 가곡집 『고향』(1947)과 『옛이야기』(1949)로 엮어 출간했다. 『옛이야기』 출간 즈음, 조두남의 서울 생활은 다음의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아현동 산골짝 조고마한 집속에서 하루 종일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그 마을에서는 노래하는 집, 피아노집이라는 별명이 붙은 씨의 집을 찾은 것이 벌써 작년 겨울 치운 날이었다. 나지막한 온돌방에서 제자들과 더부러 음악에 여념이 없는 작곡가 조두남 씨는 가곡집 “옛이야기”의 원고 정리에 분망 중이었다. 씨의 열두 살 때의 작품이라는 “옛이야기”를 비롯하여 구작 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 지난 날을 청산하고 앞날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여덟 곡 중에서 특히 “새타령”, “제비”, “뱃노래”, “추도의 노래” 등은 새로운 형식과 특수한 선율로서 이른바 서구식 찬송가적 분위기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음악 연구에 대상이 될 좋은 작품들이었다. …… 우리나라 정서가 풍기는 민족음악의 특징을 발휘하였으며 현대 화성(민족음악의 논제)의 새로운 쎈쓰를 발견할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박동현, 「신간평: 조두남작곡집 “옛이야기”」, 『조선일보』 1949.8.18.2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한 사람인 김소월의 여러 작품을, 민족적 선율에 실어 가곡으로 만들어 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민족음악을 연구하는 음악인들에게 자극이 될 것이고, 나아가 세계의 새로운 음악 조류에 빛날 향토음악·민족음악의 전도까지 양양하다고 내다봤다. 이러한 조두남의 작곡 경향은 이후에도 이어졌고, 『분수』(1962)·『산도화』(1970) 등 가곡집도 꾸준히 발간했다.
<선구자>의 창작 배경과 베일에 쌓인 작사가 윤해영
조두남은 6·25전쟁 발발 후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해 6월 건강 상태가 나빠져 요양 차 마산(현 창원시)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우연한 계기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것이 마산 정착의 계기가 되었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학생들의 피아노 교습도 진행했는데, 대개 마산 시내의 부유한 집안 자제들이었다. 제자들의 연주 실력을 뽐내는 문하생연주회도 1955년에 시작해 1974년까지 매해 개최했다.
어린 제자들이 서울 유명 음대에 진학하고, 그들이 해외 유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해 유명 음악가가 되어 고향을 찾기도 했다. 그 자신도 마산 문화예술계의 중진 인물이 되어 갔다. 1962년 마산문화협회가 한국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마산시 지부로 변경·결성될 때, 회원들에 의해 초대 예총 지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마산에 정착한 지 10여 년 만에 마산 문화예술계의 지도급 인사가 된 것이다.
1963년 연말 <선구자>가 방송을 탄 이후 <제비> 등의 작품은 전국음악경연대회(동아콩쿠르) 과제곡으로 선정될 정도로 한국 가곡계에서 그의 위상도 높아졌다. <선구자>의 대중적 인기는 유명 성악가의 가곡 음반 목록과 각종 음악회의 공연 레퍼토리에서도 확인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조두남은 1975년 『선구자』를 제목으로 한 자신의 수상집을 발간했다. 악보뿐 아니라 작곡 배경, 곡의 해설과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도 일부 담았다. 여기에 수록된 <선구자>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이 노래는 이국에서 우리 우국지사들의 활동상을 그린 것이다. 일제의 침략은 많은 애국지사를 만주로 망명케 했으며 그곳에서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독립투사로서의 선구자의 역할을 하여 왔다. 이들 선열들의 당시의 장엄한 권사(拳事)를 찬양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이다.
이 시는 북간도 용정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가사 중 첫머리에 나오는 일송정 용정 고개는 독립투사들이 오고가며 쉬던 곳으로 해란강은 지금도 옛날이나 다름없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을 것이다.”(조두남수상집 『선구자』, 1975, 15쪽)

1976년 『경향신문』 4월 24일 자, 「명시 명곡을 찾아서」라는 연재 기사에서 여섯 번째 곡으로 <선구자>가 소개되었다. 조두남을 인터뷰한 취재 기사와 <선구자> 가사, 감상담까지 담겼다. 기사에는 윤해영을 만난 일화를 비교적 상세히 다뤘다. 1933년 10월 만주 목단강의 싸구려 여관에 머물던 중 함경도 말씨의 윤해영이 찾아왔다. 그는 “이곳에 흘러와 사는 우리 동포들이 시원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라며 <용정(龍井)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를 건넸다. 더불어 용정 땅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과 그곳을 배경으로 한 독립군들의 활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조두남은 가보지는 않았으나 일송정, 용정, 해란강(海蘭江) 물줄기, 용주사(龍珠寺) 종소리도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고 한다. 그런데 곡을 맡기며 달포쯤 후에 찾아오겠다던 윤해영은 오지 않았고 이후 소식도 알 수 없었다. 세상을 떴을 것으로 추측하며 안타까워했다. 윤해영에 관한 내용은 1980년 발간된 『털어놓고 하는 말2』(뿌리깊은나무, 212∼220쪽)의 「한밤중에 찾아왔던 사람의 부탁 – 작곡가 조두남」 편에 좀 더 자세하다. 이 책의 부제는 ‘한국 현대 역사의 주춧돌들인 스물한 선구자가 다 털어놓은 정신의 모험담’으로, 조두남이 역사의 한 선구자로 자리매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두남은 이 글에서 두만강을 건너던 동포들이 부르던 노래 한 소절도 소개했다. “조국을 잃고 가는 영혼은 / 천당도 도리어 지옥되리니 / 이 말을 잊지 말고 북진하면 / 한반도 강산을 회복하리라”(필자 주: 항일노래 <조국생각>의 한 구절이다.) 윤해영을 만날 당시의 상황은 앞서와 같이 묘사되었으나, 윤해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부분에서는 명확히 독립투사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다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어 달라며 떠나간 윤해영”, “독립운동가들은 이름도 바꿔가며 숨어 살기 때문에 동지끼리도 연락이 끊기고 죽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윤해영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다”, “내 민족을 잊어버리기 쉬운 동포에게 조국의 얼을 심어 주려던 갸륵한 윤해영” 등등. 전체적으로 만주 독립운동 관련 내용과 ‘독립투사’ 윤해영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1982년 발간한 조두남의 마지막 수상집 『그리움』에도 이러한 내용들이 에피소드 형태로 나눠 실려 있다. 조두남은 『그리움』을 마지막으로 발간하고 1984년 사망했다.
밝혀지는 거짓과 진실
1990년 국내를 방문한 중국 연변대학(延邊大學)의 한 한국인 교수가, 당시 한국에서 마치 전설 속 인물과도 같았던 윤해영에 대한 내용을 언론을 통해 알렸다. 「“독립군 아닌 시인이었다” 가곡 ‘선구자’ 작사자 베일속의 윤해영씨」(『동아일보』 1990.2.28.)에서 1909년생 윤해영(尹海榮)은 함경도 출신이었고, 소학교 교사를 지내다 시인이 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나 만주국의 친일 조직인 “협화(協和)협회”에서 일했으며, 1940년대에는 친일 시를 다수 창작해 발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구자>가 여전히 일제 시기 만주로 향해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독립의 의지를 표현한 곡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작곡가 조두남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력도 여전했다. 특히 마산 사회에서 향토문화 발전과 예술진흥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란 사실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게다가 1990년대에는 근현대 역사적 인물, 특히 문화예술계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런 속에서 공공기관 또는 지자체 등은 역사 인물을 활용한 다각도의 문화관광 사업을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지자체들은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자산으로서 지역 출신 인물들에 주목했다. 특히 1998년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문화산업 진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각 지자체의 특성화된 기념사업에 정부예산을 적극 지원했다. 마산 사람들에게 조두남은 이런 기념사업을 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조두남 사망 후 유가족들이, 조두남이 남긴 악보, 악기 등 유물과 관련 자료 일체를 기증할 의사를 밝혀 왔다.
마산시는 유가족의 의사를 적극 수용하고, 국고와 지자체 재원을 투입해 <조두남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2000년 6월 마산 신포동 근린공원(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내에 조두남의 업적을 기리는 “선구자 기념공원” 조성을 계획했고, 2001년에는 조두남의 유품을 전시할 “조두남 기념관”이 “선구자 기념공원” 구역 내에 착공되었다. 완공에 앞서 조두남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도 진행되었다. 학생콩쿨이 진행되었고 이를 담은 연주 실황 CD도 제작되었다. 조두남 사망 18주기를 맞아 특별음악회도 개최되는 등 기념관 개관 전 다양한 행사들이 선행되었다.
그런데 2002년 11월호 월간 『말』에 연변작가 류연산이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선구자>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윤해영의 친일 행적을 재확인한 것뿐 아니라, <선구자>의 독립운동 관련성도 완전히 허구였다. 여기에는 조두남의 거짓말이 작용한 것이며, 그 역시도 친일 노래를 다수 작곡했다는 것이다. 마산 사회뿐 아니라 전국민을 충격에 빠트리는 내용이었다.
당시 마산에는 <가고파>를 작시한 이은상을 기념하는 문학관 반대운동이 한창이었다.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은 일제 시기 행적에 친일 혐의가 있었고, 역대 독재정권에 매번 부역하며 자신의 영달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 3·15의거와 4·11민주항쟁의 발생지 마산에서, 마산 출신이라는 또 유명곡 〈가고파〉 작시가라는 이유만으로, 이은상을 기념하는 것은 ‘마산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마산의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이하 희망연대)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반대운동이 펼쳐지던 시기에, 조두남의 친일 행적과 <선구자>의 허구성이 폭로된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희망연대는 우선 조사에 착수했다. 중국 현지에 ‘희망연대 기자’를 파견해 류연산이 만난 사람들, 즉 만주에서 조두남, 윤해영과 함께 활동했다는 생존자 김종화(金鍾和, 1921년 만주 출생)를 만났다. 더불어 그곳에 있는 일송정과 소나무 외에 1991년 새롭게 세워진 ‘선구자비’ 등 관련 유적을 영상으로 촬영하고 돌아왔다. 추가 검증의 필요를 느끼고 먼저 마산시장을 만나, 개관식을 미룰 것과 조두남의 친일 행적 의혹 규명을 위해 조사기구를 설치해 공정한 조사 실시를 요구했다. 구두로 그러겠다고 답했던 마산시장은 그러나 다음 해 2003년 5월 29일 ‘조두남 기념관’ 개관을 강행했다.

개관식 날 희망연대는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 개관식장에 들어갔고, 마산시장의 얼굴에 밀가루를 뿌려 일명 ‘밀가루 투척사건’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마산, 경남뿐 아니라 전국적 뉴스가 되어 ‘9시 뉴스’에까지 방영되었다. ‘전국 방송’을 탄 관계로 마산시와 마산시의회의 처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크게 고조되었고, 결국 ‘조두남 기념관’은 ‘휴관’을 결정했다. 더불어 희망연대가 제안한 공동 조사를 합의하고 조사단을 꾸리게 되었다.
조두남의 친일 행적 조사를 목적으로, 외부 전문가도 포함한 ‘조두남 기념관 관련 공동조사단’은 중국 연변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단은 최종적으로 “조두남이 일제하 만주 지역에서 친일음악 활동으로 친일한 혐의가 짙은 음악가로 판단”을 내렸 고, “창작 배경 또한 모두 거짓”이란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 내용은 ‘이은상(노산) 문학관’ 문제와 더불어 시민위원회에 제출되었고, 총 7차에 걸친 회의 끝에 2003년 12월 ‘조두남 기념관’의 명칭을 마산음악관으로 변경할 것을 결정했다.
마산시장은 시민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을 곧바로 수용했지만, 마산시의회는 해를 넘긴 2004년에 오히려 명칭 변경을 부결시켰다. 이에 네티즌 등의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그해 7월에 가서야 최종 마산음악관으로 명칭을 확정했다. 하지만 마산 정치권에서는 초등 교과서에 실린 조두남의 노래나, 마산음악관 외부 공원에 먼저 설치되었던 ‘일송정’ 정자와 소나무 등 조형물을 그대로 두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희망연대는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지속해오고 있다고 했다.

친일 작곡가 조두남과 친일 시인 윤해영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조두남의 대표적 친일행적은, 먼저 만주 목단강시에 거주하며 1943년 3월 만주국 『예문지도요강(藝文指導要綱)』(1941.3)의 취지에 따라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만주작곡가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만주(樂土滿洲)와 오족협화(五族協和 : 오족은 조선·중국·만주·일본·몽고를 말함)로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작사·작곡해 보급했다.
1943년에 작곡해 노래로 발표한 <징병령 만세>(『만선일보』 1942.9.11. 김영삼金永三 작시), <아리랑 만주>가 대표적이다. 특히 <아리랑 만주>는 1941년 만선일보사 학예부 주최로 공모한 신춘현상논문·문예에서 ‘신춘문예당선민요(民謠)’ 1등으로 뽑힌 윤해영의 시로, 오족협화의 낙토를 찬양하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김종화는 다음의 사실들도 증언했다. 1933년 창작했다는 <선구자> 즉 <룡정의 노래>(또는 <용정거리>)는 1944년 봄에 열린 ‘윤해영 작사·조두남 작곡 신작가요발표회’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또 윤해영이 만주에서 1940년대에만 활동한 것도 사실이 아니며, 두 사람의 관계도 잠깐 만나고 영영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나이의 반평생> <고향생각> <아리랑 만주> 등을 함께 만들고 술을 마시면서 회포를 나누던 사이라는 것이다. 또 조두남은 194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스파이는 날뛴다>(スパイは跳る)를 악극단 공연으로 소개하는 한편 시국친일가요 <황국의 어머니>도 발표했다고 했다.
<참고문헌>
- 조두남 수상집 『선구자』(세광출판사, 1975), 『그리움』(세광출판사, 1982)
- 류연산, 「연변작가 류연산의 알려지지 않은 일제시대 인물 발굴 : 조두남 –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말』 통권 197호(2002.11)
-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 노동은, 『친일음악론』(민속원, 2017)
- 이명숙, 「친일 인물을 둘러싼 기억투쟁과 시민의 과거청산운동 – 민족문제연구소와 열린사회희망연대의 친일청산운동을 중심으로 -」, 『역사와 책임』 18호(2026.6. 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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