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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민일보] 악질 친일파 처단… 19년 옥고 버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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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그날의 함성 역사적 현장 구미
구미 봉곡동 출신 박희광 선생
1922년부터 통의부 5중대 배속
1923~1924년 임시정부 지령 받아
만주·한만서 일본군 공격 작전 참가
‘3인조 암살단’ 활약하며 이름 떨쳐
1924년 7월 펑톈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실패 후 일본경찰에 체포
혹독한 고문 겪으면서 19년간 복역
출옥 후 고향서 양복 수선하며 생계
1970년 1월 고문 후유증으로 숨져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자 묘원에 안장

박희광 선생.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참석자들이 ‘독립군가’를 제창할 때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의 회원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동상 주변 구조물에 부조된 ‘삼인조 암살단’. 중앙이 박 의사다.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체포 당시 상황을 보도한 1924년 7월 26일 자 독립신문 기사. 왼쪽 사진의 ‘박상만’이 박 의사다.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1월 열린 ‘박희광 선생 56주기 추모식’에 김장호 구미시장을 비롯해 유족과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구미 금오산도립공원으로 가는 길을 오르다 보면 금오지가 끝나는 길목에서 금빛 동상 한 개를 만날 수 있다. 저수지를 등진 채 금오산을 바라보면서 오른손을 들고 있는 입상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박희광(1901~1970) 의사다. 그는 일제강점기 펑톈성에서 보민회와 일민단 등 친일 부역자 숙청작업을 담당한 독립운동가다. 다가오는 3.1절을 맞아,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박희광 선생의 숭고한 삶을 다시금 주목해본다.

▲만주를 누빈 3인조 암살단과 친일파 응징

이름을 상만으로도 쓴 박희광은 구미 봉곡동 출신으로 박윤하의 아들이다. 경술국치(1910) 이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는데 일가가 만주로 이주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부친 역시 의병으로 활동했다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박희광은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부터 오동진(1889~1944) 휘하 통의부에 들어가 제5중대에 배속돼 친일 세력을 비밀리에 암살하는 특공대원 임무를 맡았다.

그는 김병현(?~1926, 1995 애국장), 김광추(?~1924, 1996 애국장)와 함께 수행한 암살 임무로 뒷날 재판 과정에서 ‘3인조 암살단’으로 불리었다.

1923년에서 1924년까지 그는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만주 철도 연선과 한만 국경지대에서 일본군 공격 작전에 참가했다. 1923년 다롄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924년 6월에는 푸순 방면의 밀정이며 뤼순 조선인회 서기 정갑주 부자를 주살했다.

19년간 뤼순감옥에서 복역한 장기수 세 사람은 표적 인물의 집 대문에 사형선고문을 붙인 뒤 거사를 벌여 그것이 친일 부역자에 대한 응징임을 분명히 했다. 1924년 6월, 세 사람은 만주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일제 앞잡이였던 보민회장 최정규(1881~1940)의 집을 습격,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을 사살했다.

최정규는 만주 보민회를 조직해 독립운동단체의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무고한 양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밀고와 살상을 감행한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선 공로로 일본 외무성에서 위로금 1000원을, 1924년 보민회 해산 당시엔 배당금으로 1500원과 위로금 1만원을 받은 악질 부역자였다.

▲총영사관 폭탄 투척과 참혹 고문, 그리고 19년의 옥고

1924년 7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폭탄을 펑톈의 일본 총영사관에 투척했으나 불발돼 실패했다. 그날 저녁, 이들은 고급요정 금정관에 침입해 주인에게 군자금을 요구해 300원을 탈취했다.

그러나 집 밖에 세 사람의 낌새를 눈치채고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광추가 총을 맞아 절명했고 박희광은 김병현과 함께 체포됐다. 일경은 증거물로 권총 세 자루, 실탄 160발, 폭탄 한 개, 사형선고문 여러 장을 압수했다.

조사과정에서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일경은 대나무 껍질을 얇게 깎아서 이들의 엄지손톱 사이에 쑤셔 넣었고, 뻣뻣한 돼지 목털로 귀두를 찌르는 잔인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고문은 쉴 틈도 없이 이어졌다.

박희광은 뤼순지방법원의 제1심에서 사형을, 뤼순고등법원에서는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갇혔다. 뤼순 감옥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처형(1910)되고,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이 수감 중 순국(1932)한 곳이었다. 동지인 김병현도 1926년 처형돼 순국했다.

▲출옥 후 양복 수선하며 생계 꾸린 독립운동가

박희광은 일왕 히로히토 즉위와 황태자 출생 등 두 차례 감형으로 최장기 복역 후 출옥했다. 그는 충칭으로 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고향인 구미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마흔넷의 만혼으로 아내를 맞이했고 광복을 맞았다.

해방 조국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돼 있었으나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는 귀국한 백범 김구를 찾았으나 백범은 위로금을 주면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1949년 백범이 불의의 총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그의 기다림도 무위로 돌아갔다. 실제로 20대에 투옥돼 40대가 돼 출옥한 그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양복 수선하며 생계 꾸린 독립운동가”

박희광은 감옥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대구 교동시장에서 양복점을 열었으나 시장에 일어난 화재로 가게와 생업 기반을 잃었다. 고향인 구미로 돌아온 그는 양복 수선으로 5남매를 기르며 가난하게 살았다. 만주에서 삼인조 암살단으로 이름을 떨치던 독립운동가가 양복을 짓고, 수선하면서 살아야 했던 세월은 꽤 길게 이어졌다.

1967년 초 뤼순지방법원의 재판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가 발견되면서 그는 1968년 삼일절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보훈 대상자가 되면서 생활이 다소 나아졌으나 그는 1970년 1월 22일 일제 고문 후유증으로 서울 원호병원에 입원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박희광은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자 묘원에 묻혔다.

▲사후 14년 만의 동상 제막과 역사의 아이러니

고향인 선산에서 박희광 기념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이태 후인 1972년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다가 1983년 구미문화원 사업으로 착수해 이듬해 12월에 동상을 제막했다. 사후 14년 만이었다.

동상 주변의 기록에 따르면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愛國志士 朴喜光 先生 之像’(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지상) 친필 휘호와 동상 건립비 ‘壹百萬圓(일백만원)’을 ‘하사’하면서 동상 조성에 들어갔다.

박희광 의사가 만주군 장교 출신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돌 기단을 딛고 서 있는 이유다. 친일파를 응징하다가 뤼순감옥에서 19년을 복역했던 이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이 일본 육사를 나온 만주국 장교 출신 인물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아닌가.

지난 1월 22일, 박희광 선생 동상 앞에서 박희광 선생 56주기 추모식이 진행됐다. 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공동 주최한 행사다. 김장호 구미시장을 비롯해 유족과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추모식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보훈처장과 민족문제연구소장 등이 보내온 화환이 동상을 둘러싸 쌀쌀한 날씨를 녹였고, 광복회 간부들과 함께 지역 정치인들도 참석해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렸다.

김형식 기자

<2026-02-25> 경북도민일보

☞기사원문: 악질 친일파 처단… 19년 옥고 버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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