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코시 강제동원’ 사과 촉구 한일 시위

“어머니는 제자들을 근로정신대에 보냈다는 생각에 죽을 때까지 나쁜 일을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던 겁니다.”
25일 일본 동북부 도야마현에 있는 기계·부품회사 후지코시의 도야마 본사 앞에서 후지코시가 조선인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한·일 시민들의 시위가 열렸다. 후지코시 주주총회 날에 열린 이 시위에는 어머니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교사였던 와카타니 마사키(76)도 참여했다. 그는 전날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 어린 조선인 아이들이 왜 일본에서 강제노역을 했어야 하냐”며 “후지코시가 과거 잘못에 대한 사과와 강제노역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어머니 와카타니 노리코는 인천 송현공립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44년, 제자 7명이 군수품 제조 공장이던 후지코시로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정부는 군수 물자 생산에 필요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당시 국민학생들까지 강제동원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4년 7월4일자는 “인천부(현재 인천시) 여자 근로정신대 모집에 따라 송현국민학교 졸업생 중 27명이 응모, 13명이 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가면 여자아이들도 공부를 할 수 있다”, “큰돈을 모아 부모님께 보낼 수 있다”는 같은 거짓말에 속아 일본에 간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초등학생 또래 아이들이 철제 부품들을 자르고 깎아 전쟁 물자를 만들었다. 하루 14시간 노동이 일상이었다. 중기계를 다루다가 손가락이 잘리거나, 머리카락이 기계에 빨려들어가 큰 부상을 입는 일도 잦았다. 끼니는 주먹밥 두 덩이로 때웠다.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한명이라도 일을 못 끝내면 (모두에게) 밥을 안 줘 풀까지 뜯어 먹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와카타니 노리코는 제자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그들과 찍은 사진을 평생 간직하다 2019년 유명을 달리했다. 아들에게 힘겨운 기억을 알린 것도 불과 10여년 전 일이지만 구체적인 당시 상황과 자신의 위치 등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대법원은 2024년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1인당 8천만~1억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최종 판결했다. 그러나 후지코시는 일본제철 등 다른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들처럼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판결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한·일 간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던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결은 윤석열 정부가 2023년 3월 가해 일본 기업 대신 한국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피해자들에게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안’으로 봉합에 나섰다. 이재명 정부도 기존 합의는 존중한다는 방침이다.
피해자 유족들과 30년 이상 후지코시 피해자를 지원해온 시민단체 ‘호쿠리쿠 연락회’ 등 한·일 시민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해마다 후지코시 주주총회를 찾아 사과하고 한국 법원 결정을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25일에도 피해자인 고 임영숙 할머니의 남편 김명배(95) 할아버지가 도야마로 와 “제 아내는 어린 나이에 도야마 후지코시에 끌려와 강제노동을 당했다”며 “후지코시는 왜 전범기업으로 단죄한 한국 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않느냐”고 따졌다.
하지만 이날도 후지코시는 “강제 연행·노동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익 단체들이 검은 승합차 10여대를 끌고 와 “불법행위는 없었다”고 소리치며 시민들을 위협하는 행위도 반복됐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후지코시가 법적, 역사적 책임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며 “대법원 판결에 따라 배상하고 사죄하는 게 역사 정의에 걸맞은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도야마/글·사진 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2026-02-25>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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