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1907년, 대한제국 위기 극복에 동참한 민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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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한제국 위기 극복에 동참한 민초들
– 부천지역의 국채보상운동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시민기자

1997년 11월 우리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긴급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김영삼 정부의 무능한 금융정책으로 많은 기업들은 무분별하게 외국 자본을 차입하여 과잉투자를 하였으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경제에 불안을 느낀 외국자본들은 급격히 빠져나갔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기업들은 파산하였으며 노동자들은 대량실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를 겪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국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나라에 위기가 찾아오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위기를 극복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창의했던 의병과 조선후기에 창의했던 의병이 바로 그것이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금모으기운동’을 전개하였다. 부족한 외화를 보충하기 위해 금모으기운동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4년 만에 IMF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금모으기운동이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도 있었다. 대한제국시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하여 한반도로부터 강대국들을 몰아냈으며 동시에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1907년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켰다. 또한 대한제국에 과도한 차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총 1300만원에 이르는 거대한 돈으로 이 액수는 대한제국의 1년치 예산과 맞먹는 것이었다. 국력이 많이 약해진 대한제국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 선조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07년 대구에서 김광제·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를 민간인이 보상하자는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에 부천의 시민들도 동참한 것이다.

1907년 당시 부천의 행정구역은 부평군

1907년 부천시에 해당되는 국채보상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천의 옛 행정구역을 알아야 한다. 부천은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 부평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부평군 중 석천면(상리 중리 구지리 심곡리), 옥산면(소사리, 당하리, 조종리, 범박동리, 괴안리, 벌응절리), 상오정면(약대리, 삼정리, 내촌리, 도당리, 오정리), 하오정면(고리동리, 언담리, 성곡리, 여월리, 작동리), 주화곶면(대장리, 장산리, 오곡리, 오금리) 일부가 부천시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옥산면 조종리는 현재의 원미구 원미동에 해당되는 곳이다. 조종리(朝宗里)는 그 유명한 조마루가 되는 곳으로 이용순 외 14명이 9환 40전을 모았다. 이 내용은 1907년 4월 16일 황성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이원서(李元西)는 1909년 부평군 옥산면 소사리에 새워진 계남학교를 위해 논 5두락을 특별 기부하였다. 이 당시 외세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계남학교는 현재의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에 위치한 것으로 6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교육비를 모았는데 이원서 씨가 핵심 역할을 한 것이었다.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富平郡 下梧亭面 遠宗里), 현재의 오정구 원종동 주민들은 총 64명이 18원 90전을 모금하였다. 부천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들이 참여하여 모금하였으며 이 내용은 이 외에서 1907년 5월 8일(『황성신문』)에는 하오정면 작동 주민들이 참여하였으며, 1907년 6월 4일(『대한매일신보』)에는 상오정면 약대리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1907년 6월 13일(『대한매일신보』)에는 상오정면 약대 내촌 주민들이 참여하였으며, 1907년 6월 22일(『대한매일신보』)에는 상오정면 도당리와 오정리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1907년 7월 31일(『황성신문』)에는 석천면에 사는 무부청(巫夫廳) 소속의 신흥복, 신흥선, 신흥봉, 힌용현과 옥산면의 한득달과 한용민도 모금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1907년 8월 17일(『대한매일신보』) 구지리(九芝里) 서병흥이 모금에 동참하였다.

이처럼 1907년 당시 부천에 거주했던 선조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을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자랑스런 역사를 발굴하여 많은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알리는 사업이 진행되길 기대해본다.

• <오마이뉴스> 202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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