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식산은행의 방계로 창설된 성업사(成業社)라는 회사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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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0]

대천 간척지 소작인의 명의로 세워진 ‘보령 성업사 시덕기념비(1938년)’
– 조선식산은행의 방계로 창설된 성업사(成業社)라는 회사의 정체

이순우 특임연구원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가 마을 어느 곳을 가나 그 주변에 ‘간사지(干瀉地)’라는 지명으로 통용되는 지역들이 제법 존재한다. 대개는 이 ‘간사지’라는 표현이 ‘간척지(干拓地, 갯벌매립지)’의 의미를 품고 있는 말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실상 ‘간사지’는 ‘간척지’도 아닐 뿐더러 — 정확하게는 — ‘간석지(干潟地, 갯벌)’를 잘못 적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간석지’라고 할 때 석(潟)이 ‘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앞에 붙은 ‘방패 간(干)’이라는 글자는 과연 어떤 뜻으로 새겨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고문헌 자료에는 갯벌을 나타내는 단어로 해택(海澤, 갯벌), 석로(潟鹵, 소금펄), 노지(鹵地, 짠땅) 등의 용례가 두루 확인되지만, 유독 ‘간석지’라는 표현 그 자체는 좀체 그 흔적이 눈에 띄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아무래도 일본 쪽에서 넘어온 근대식 용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찾아봤더니, 1867년에 발행된 『일영사전(Japanese and English Dictionary)』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 Hikata, ヒカタ, 干瀉, A dry sandy beach
– Hiki-shiwo, ヒキシホ, 引汐, Ebb-tide

여길 보면 우선 ‘간사(干瀉, 히카타)’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어찌 된 것인지 그 뜻이 ‘갯벌’이 아닌 ‘모래해안’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사(瀉; 샤)’라는 한자는 일본어에서 음독(音讀)이건 훈독(訓讀)이건 간에 ‘카타’라는 발음과 무관하고, 정작 이 음가를 갖는 글자는 ‘석(潟; 세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카타’의 소리값에 해당하는 원래 단어는 ‘간사(干瀉)’가 아니라 ‘간석(干潟)’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사’라는 표기가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예로부터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관행적으로 혼용하는 것이 일본의 언어습성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짚어보아야 할 대상은 ‘밀물’과 ‘썰물’을 나타내는 표현에 관한 것이다. 우리 쪽에서는 이를 가리켜 조석(潮汐)이라든가 석수(汐水, 썰물)와 조수(潮水, 밀물), 그리고 조만(潮滿)과 조퇴(潮退), 조진석퇴(潮進汐退), 조석수진퇴(潮汐水進退) 등의 용어가 두루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일본 쪽에서는 대표적으로 “조석간만(潮汐干滿, 쵸세키칸만)의 차(差)”라는 관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간조(干潮, 썰물)’와 ‘만조(滿潮, 밀물)’의 형태로 이를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간(干)’은 도대체 어떻게 썰물의 뜻이 되는 것일까? 우선 위의 일영사전에서 적시한 대로 썰물은 ‘인석(引汐=引潮; 히키시오)’으로 표시되는데, 이는 간조(干潮; 히시오)와 동일한 개념이다. 특히, 물이 써는 것을 일컬어 ‘히루(引る=ひる)’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이때 이 글자는 ‘干る’로 대체되는 동시에 발음도 동일하다. 이에 따라 일본어에서는 ‘간(干)’은 물이 밀려나가는 현상을 나타내는 말로 인식되며, 그러한 까닭에 썰물은 곧 — 전형적인 일본식 조어(造語)의 하나로서 — ‘간조(干潮, 히시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1941~2003)의 연작소설집 『관촌수필(冠村隨筆)』(문학과지성사, 1991)을 읽다가 거기에 “간사지 수문 앞 갈대밭”이라든가 “간사지 농사짓는 사람”이라고 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관촌(갈머리)’은 충남 보령의 대천(大川, 한내)에 있는 마을이다.

그러고 보면 보령 일대도 곳곳이 ‘간척지’ 투성이다. 군청소재지인 대천면 주변은 물론이고 보령군 관내의 오천면(鰲川面), 청소면(靑所面), 주포면(周浦面), 천북면(川北面), 웅천면(熊川面) 지역에서도 일찍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대규모 공유수면매립이 진행된 바 있고, 알고 보니 1932년에 처음 개장한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 대천면 군입리)의 배후지역 역시 간석지 매립을 통해 형성된 땅이었다.

장항선 직선화 공사와 더불어 지난 2007년 12월 21일에 역사(驛舍)의 위치를 옮겨 새로 개업한 대천역(大川驛, 보령시 내항동 336-11번지)에서 내려 대천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따라 잠깐 걸어가면, 불과 4백 미터 남짓 떨어진 지점의 도로변에서 대천농협의 창고건물(보령시 내항동 357-3번지)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간척지 조성사업이 한창 성행했던 시절이 남겨놓은 흔적의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창고 앞 철책 안에 서 있는 ‘주식회사 성업사 시덕기념비’라는 이름의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주식회사 성업사 시덕기념비’의 비문 풀이

[전면] 株式會社 成業社 施德記念碑(주식회사 성업사 시덕기념비)
干潟成畓 衆人作農 耕者歌裕 作人誦恩
隨時事業 窮民救恤 貴社惠澤 立石不忘
(간석지가 논이 되어/ 여러 사람이 농사를 짓게 되네/ 땅을 가는 이는 노래하며 여유롭고/ 소작인은 은혜를 칭송하네// 시대에 따라 사업을 하여/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나니/ 귀사가 베푼 혜택을/ 비석을 세워 잊지 않으려 하네//)
忠南大川 小作人一同(충남 대천 소작인 일동)
[우측면] 昭和十三年 戊寅 五月 日[소화 13년(1938년) 무인년 5월 일]

비문의 내용에도 나오거니와 “간석지를 메워 논을 만들었다”는 구절은 무엇보다도 이 비석이 만들어진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눈을 돌려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사방이 온통 탁 트인 벌판인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갯벌을 메워 조성한 간척지라는 것을 금세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석의 표제(表題)에는 ‘시덕(施德)’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명(碑銘)으로 짐작컨대 덕을 베풀었다고 함은 암만 봐도 간척지를 만들어 소작 지을 기회를 주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한데, 식민지배의 상황이다 보니 그나마도 그것을 대단한 시혜(施惠)의 하나쯤으로 여겼던 탓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성업사(成業社)’라는 회사의 정체는 무엇이며, 도대체 무슨 덕을 얼마나 많이 베풀었길래 다른 이도 아닌 소작인들의 손으로 이러한 비석을 세워줬다는 것일까?

우선 이 비석의 건립과정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자료가 확인되질 않았으므로 자세한 내력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소화 14년도 조선토지개량사업요람』(조선총독부 농림국, 1941)을 보면, 「수리조합에 의하지 않은 토지개량보조사업 일람표」에 ‘성업사’가 보령군 대천면 간척지(1925년 3월 9일 허가, 1928년 7월 24일 준공)의 기업자(企業者)로 표시된 부분이 있으나, 그 아래에 따로 넣은 괄호 안에 ‘나카노 신조(中野新三)’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를 단서로 하여 공유수면 매립허가사항에 관한 기록들을 간추려 봤더니, 대천 내항리 간석지 매립공사는 최초 1925년 3월에 면허(278,400평 규모)가 발급되었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28년 7월에 준공인가(226,417평)를 받아낸 것으로 드러난다. 원래의 허가신청자는 충남흥업주식회사(忠南興業株式會社)의 사장인 ‘나카노 겐조(中野元三)’의 명의로 표시되어 있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준공 이후 매립지 취득자는 ‘나카노 신조(中野新三)’로 이름이 약간 달라져있다.

여기에 나오는 충남흥업은 1920년 12월에 미간지 개간(未墾地 開墾)과 토지경영(土地經營), 그리고 이주농어촌(移住農漁村)의 경영 등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회사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이 회사가 — 무슨 개인신상의 변고가 생겼거나 경영상의 난관에 봉착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 1925년 7월 26일에 이르러, 그것도 하필이면 간석지 매립허가를 받아낸 바로 직후의 시점에 주주총회를 통해 해산(解散)을 결의하는 동시에 청산인(淸算人) 선임절차를 마쳤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곳 대천 내항리 간척지는 준공연도인 1928년 당시부터 전체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면적(20여 정보)이 이미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의 직할경영지로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러한 탓인지 『조선식산은행 십년지(朝鮮殖産銀行 十年志)』(1928)에는 ‘나카노농장 간척지(中野農場 干拓地, 충청남도 대천)’라고 표시된 한 장의 전경사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관계를 반영하는 결과물인 듯하다.

그러다가 성업사가 이곳의 관리 일체를 넘겨받아 대천출장소(大川出張所)를 개설하고 소작경영을 직접 관할하기 시작한 것은 1933년 3월 7일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9일자에 수록된 「다년현안(多年懸案)이던 간사지(干瀉地) 수(遂) 준공(竣工)」 제하의 기사에는 성업사가 대천 매립지를 매수하던 시절의 상황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보령(保寧)] 보령군 대천(保寧郡 大川) 해안(海岸)에 있는 간사지(干瀉地, 간석지)는 다년간 여러 사람이 공사에 노력하였으나 필경은 필력치 못하던 중에 있더니 그간 식산은행에 자매회사인 성업사(成業社)에서 4만 원에 매수하여 방조제연장(防潮堤延長) 705정보를 공사비 1만 2천 원에 예정으로 남견조(楠見組, 쿠스미구미)에 청부를 맡겨서 금년 5월 25일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던바 인부임(人夫賃)을 최고 90전으로 최하 45전씩으로 하고 조매일 현금으로 지불하여 다른 공사장과 같이 전표를 중간인이 매매하는 폐단이 없어서 제일 불평이 없이 지난 9월 5일까지에 무사히 준공을 하였다는데 공사장 중에 이와 같이 불평이 없었던 것은 처음이라 하며 그 공로자는 감독으로 파견되었던 이완옥(李完玉) 씨의 진력이 많다 한다.

이 기사에 언급되어 있듯이 성업사의 정체는 바로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기구의 하나인 조선식산은행의 ‘자매회사(姉妹會社)’였던 것이다. 그 시절의 표현으로는 통칭 ‘방계회사(傍系會社)’라고도 했는데,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계열회사’ 내지 ‘자회사’ 정도의 개념이라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 이 회사는 조선식산은행의 출자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중역(重役)의 구성도 대개 이 은행의 중견간부들이 그대로 옮겨와서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도 설립목적을 “1. 토지 및 농사경영, 2. 부동산의 매매, 대차 및 관리”라고 적어놓은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식산은행에서 미상환 대부(未償還 貸付)로 인해 유입되는 토지와 간척농장 등의 부동산 담보물건을 관리 경영하고 이를 회수하려던 것이 이 회사의 창립 배경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경성일보』 1931년 5월 8일자에 수록된 「식은(殖銀)의 방계(傍系)로서 유입부동산 경영(流込不動産 經營), 카와사농장(川佐農場) 수직(樹直, 회복)을 위해 자본(資本) 2백만 원(圓)으로 성업사(成業社) 창립결정(創立決定)」 제하의 기사는 성업사가 만들어지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황해도 옹진군 용연면 장릉리에 8백 정보(町步)를 거느리는 카와사농장은 진즉에 식은(殖銀, 식산은행)으로부터 약 50만 원의 융통(融通)을 받아 경영을 이어왔던바 구랍(舊臘) 고(故) 카와카미 사타로 씨(川上佐太郞氏)의 병몰후(病歿後) 식은에서는 예의(銳意) 이의 재정비 방안을 고구(考究)하고 있었는데 금회(今回) 본부(本府, 총독부) 재무당국의 양해를 얻어 자본(資本) 2백만 원, 4분의 1 불입(拂込)의 주식회사 성업사(株式會社 成業社)를 창립(創立)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전기(前記) 카와사농장을 매수하여 농사경영(農事經營)을 행하기로 되었다. 정관안(定款案) 작성, 기타 창립준비를 진척시키고 있으며, 본사(本社)는 경성 남대문통 일본생명빌딩(日本生命ビルディング) 안의 선만개척사(鮮滿開拓社) 내에 두고, 동사(同社) 미요시 토요타로 씨(三好豊太郞氏)를 중심으로 식은으로부터 토츠 가쿠 씨(戶津學氏)가 중역(重役)에 들어갈 모양인데, 본월말 창립총회 개최를 진행할 예정이며 창립 후에는 식은의 방계회사(傍系會社)로서 식은에 있어서 유입부동산(流込不動産)의 경영을 맡을 예정.

이와 함께 창원농장(昌原農場, 258정보)과 철원농장(鐵原農場, 600정보)을 잇달아 낙찰받으면서 성업사는 대규모 농장경영과 부동산관리 및 처분회사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1934년에 이르러 미곡통제(米穀統制)의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토지개량과 품종개량을 통한 제2차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 중단되자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부동산 관련수입의 비중과 총자산 대비 부동산 구성비가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성업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1935년도 말에 ‘유가증권(有價證券)의 취득 및 처리’ 항목을 사업목적에 새로 추가하는 한편 이른바 ‘토지열(土地熱)’에 편승하여 보유 부동산을 급속히 처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아울러 이 시기에 성업사는 조선개척(朝鮮開拓)과 불이흥업(不二興業) 등 대규모 농업회사의 주식을 대거 취득하여 최대주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때마침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전시통제경제의 운용이 강화하는 움직임이 일자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시국관련’ 광공업회사에 대한 유가증권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게 된다.

여기에는 통칭 ‘식은블록(殖銀ブロック)’에 속했던 조선제련(朝鮮製鍊), 조양광업(朝陽鑛業), 한강수력전기(漢江水力電氣), 조선농기구제조(朝鮮農器具製造), 국산자동차(國産自動車), 조선무연탄(朝鮮無煙炭), 조선고주파중공업(朝鮮高周波重工業), 조선저장식량(朝鮮貯藏食糧), 일본마그네사이트화학공업(日本マグネサイト化學工業) 등이 포함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성업사라는 회사는 그 자체가 전시체제를 지탱하는 일종의 지주회사(持株會社)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업사가 기본적으로 소작관계에 바탕을 둔 대표적인 식민지 농업경영회사(직할농장과 수탁농장을 운영)의 하나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이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국면으로 접어들기 직전의 시점에 나온 『조선신문』 1941년 11월 11일자를 보면, 여기에 수록된 「조선농업간담회(朝鮮農業懇談會), 반도농업(半島農業)의 발전(發展)을 기(期)함」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시국중대(時局重大)한 때에 선내(鮮內) 농업경영자는 당국의 증산계획에 협력하여 곡창반도(穀倉半島)의 면목(面目)을 발휘해가고 있는데, 불이흥업(不二興業), 조선농회(朝鮮農會), 동척(東拓, 동양척식), 신탁(信託, 조선신탁), 조선개척(朝鮮開拓), 성업사(成業社) 등이 위원(委員)이 되어 선내 농업단체(農業團體) 및 유지자(有志者)를 망라하여 조선농업간담회를 설립(設立), 시국(時局)에 즉응(卽應)하고 조선농업의 발달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으로 되어, 그 타합회(打合會)를 11일 조선농회 내에서 개최했는데 제1회 농업간담회는 오는 15일 부민관(府民館)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되었다. 또한 본회(本會)의 사무소(事務所)는 당분간 조선농회 내에 두어 취급(取扱)하기로 되어 있다.

여길 보면 시국상황을 뒷받침할 식량증산계획에 맞춰 제1회 조선농업간담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불이흥업, 동양척식, 조선신탁, 조선개척 등과 함께 ‘성업사’도 여전히 농업경영자 대표위원의 명단에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이 회사는 일찍이 식민지 수탈에 앞장섰던 주도적인 농업경영회사의 하나로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체제기 이후 시국관련 통제경제의 확충에 크게 기여했던 주축 기업체였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그저 덕을 베풀어 준 것에 감사하여 대천 소작인들의 명의로 세웠다는 저 기념비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 ‘성업사’라는 회사가 일제강점기에 어떠한 위상을 지녔고,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그 정체를 좀 낱낱이 적어두는 안내판 하나쯤은 마땅히 설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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