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재중 조선족 작가의 항일문학과 재중 동포문학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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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 조선족 작가의 항일문학과 재중 동포문학의 현재

리홍규 (중국 하얼빈) 시인·소설가

중국조선족 항일문학은 광복 전에는 재중 조선인(한국인)에 의해 광복 후에는 중국조선족에 의해 중국 본토에서 한글과 한어(漢語, 중국어)로 창작했거나 발표된 항일 관련 문학작품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 항일문학은 시간적으로 크게 광복 전과 후로 갈라볼 수 있고 광복 후 조선족문학은 또 중국의 개혁개방을 분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 광복 후 30여 년간 조선족 항일문학, 개혁개방 후 조선족 항일문학, 중국조선족 문학의 현재 등 네 개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하게 된다. 편폭의 제한으로 광복 전 항일문학은 항일가요와 항일연극을 위주로, 광복 후 항일문학은 소설과 항일 관련 전기문학을 위주로 다루고자 한다.

1.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을 살펴보기에 앞서 항일문학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배경이 되는 중국 동북으로의 조선인 이민과 그 과정에서 조선인 이민공동체문화와 그 구성부분인 조선인문학의 형성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당시 만주(滿洲)라고 불렸던 중국 동북으로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민은 1869년부터 1874년까지 5년에 걸쳐 조선북부의 흉작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후 농민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간도(間島)라는 현재의 연변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시작으로 식민통치가 날로 극심해지면서 북만주까지 포함한 만주 전역으로 조선인들의 이민이 폭증되었다. 조선인 마을이 일어서고 학교들이 창설되며 민족독립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지사들이 이끌던 독립운동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주도하에 반일무장투쟁으로 전환되었고 따라서 많은 항일가요와 항일연극들이 창작되어 조선인 이민들 속에서 보급되었다. 그 이전부터 조선인학교와 신문, 잡지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식자 인구가 상당한 규모로 늘어나고 그들 가운데는 문화인과 작가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조선반도로부터 기성작가들도 적잖게 유입되면서 문단이 이루어지고 수준 있는 조선인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국조선족문학의 발단이 되는 이민 시기의 문학은 조선반도로부터 건너온 이주민들이 하나의 이민공동체문화를 이루어가는 가운데 그 구성 부분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1) 항일가요

가요는 가사와 선율의 결합체로서 시적 형상과 선율의 음악적 형상이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창작자의 사상과 정감을 표현한다. 항일가요도 본래의 의미에서 이러한 가사와 선율이 결합된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항일가요는 가사의 문학적 요소가 한결 강조되고 조명받아 전해져온 문학 형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항일가요의 특징은 우선 항일투쟁 생활을 시적으로 일반화하고 대부분 항일투사에 의해 직접 창작되어 항일군민(軍民)들 속에서 널리 불리었다는 것이다. 항일가요는 항일투쟁 체험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항일투쟁 생활을 시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는바 항일혁명사상이 일관하게 반영돼 있었다.

중국조선족은 동북으로 이민해 와서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는 가운데 세계의 다른 민족공동체나 세계의 다른 이주민족들과 다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땅을 개척하는 개간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에까지 침략해 들어온 일제를 비롯한 외래 침략자들과 항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른바 “불령민(不逞民)”이었다. 그래서 조선인 이주민들에게는 광활한 만주 땅을 논밭으로 개척한 개척자면서 일제 및 그 주구들과 피어린 항전을 벌인 항일투사라는 두 개의 신분이 부여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항일가요는 전쟁이라는 환경의 산물이었고 피 흘리고 목숨 바쳐 싸운 투사들의 심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때문에 항일가요는 개체보다 군체를 앞세운 문학이고, 공리성을 중히 여기고 심미적 요소를 크게 따지지 않는 문학이었으며, 이념을 선양하고 개성이 약화되는 문학으로서 항일투쟁을 위하여 동지를 격려하고 민중을 궐기시키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주로 했던 것이다. 항일가요는 이처럼 대부분 명확한 목적성과 공리성을 갖고 있으며 영웅주의와 낙관주의적인 정서로 일관돼 있다. 항일가요의 이러한 정신적 요소는 일제패망 후 중국조선족문학 특히 시문학에서 오랫동안 계승되고 발전되기도 했다.

구비전승문학의 한 형태로서 항일가요는 광복 후에도 중국조선족 대중들 속에서 오랫동안 전해지고 불리었고 전문가들에 의해 수집·정리되었으며 수십 년 동안 중국 내 여러 지역에서 여러 종의 책자로 출간, 발행되었다. 그 책자로는 『혁명의 노래』(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원회 선전부 편찬, 연변인민출판사, 1958년), 『노래집—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때 부르던 노래묶음』(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동창회준비위원회 편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조선족항일투쟁노래선집』(전정혁 수집정리, 료녕인민출판사, 1995년), 『동북항일연군가곡선』(리민 편찬, 하얼빈 동북경제문화중심, 한문판, 1995년) 등 4권이다. 이밖에 『항일투쟁시기 노래집』(연변대학 사회과학학부 편찬, 1957년), 『혁명역사가요편』(연변문학예술연구소 편찬, 1990년)을 비롯한 등사본이 있다.

조선과 한국에서도 여러 종의 항일가요 책자가 출간되었다. 조선에서 출간된 항일가요집은 『혁명가요집』(조선 당역사연구소 편찬, 조선로동당출판사, 1959년), 『혁명시가집』(조선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편찬, 문학예술출판사, 2002년) 등이 있고 한국에서는 『독립군가곡집—광복의 메아리』(독립군가보존회 편찬, 교학사, 1982년), 『독립군시가집—배달의 맥박』(독립군시가집편찬위원회 편찬, 송산출판사, 1986년), 『님 찾아가는 길—독립군시가 자료집』(황선열 편, 한국문화사, 2001년) 등이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는 “항일가요”, “항일혁명가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의병가요”, “독립군시가”로 통하는 것 같다.

이상 중국과 한반도 남북에서 수집 정리되고 출간된 자료에 수록된 가요들은 중복되는 것이 많다. ‘중국조선족문학유산 정리편찬’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항일시가집』(최삼룡 주필, 북경 민족출판사, 2012년)은 상기 항일가요와 독립군시가들을 집대성한 자료집으로서 333수 가요가 수록되었다.

항일가요는 대부분 항일투사의 집단적인 힘과 예술적인 재능에 의해 창작되고 윤색되어 불려졌던 바 내용상 아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제의 침략 죄행을 폭로하고 단죄하며 민족의 비참한 운명을 통탄하면서 민족해방의 사상을 고취한 작품이다. ‘반일전가’, ‘9.18사변가’, ‘민족해방가’, ‘일어나라 무산대중’ 가요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제놈들의 말발굽소리 더욱 요란타/ 만주벌과 넓은 천지 횡행하면서/ 살인방화 착취략탈 도살의 만행/ 수천만의 우리 대중 유린하도다/ 나의 부모 너의 동생 그대의 처자/ 놈들의 총창 끝에 피흘렸고나/ 나의 집과 너의 집, 놈들의 손에/ 잿더미와 황무지로 변하였고나/ 일어나라 단결하라 로력대중아/ 굳은 결심 변치 말고 살길을 찾아/ 붉은기 아래 백색공포 뒤엎어놓고/ 승리의 개가 높이 만세 부르자
— ‘반일전가’에서

두 번째는 인민대중을 항일투쟁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 로동대중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이런 항일가요들에서는 일제와 싸우기 위해 계급, 계층, 성별, 신앙을 초월해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일부 항일가요는 또 조중(한중)인민의 통일과 단합을 강조하면서 “일어나라 압박받는 조중 민족아”, “반일전선에 뭉쳐나서라”라고 호소하고 있다.

만주의 벌판에 불이 붙는다/ 만주의 뫼봉우리에 불이 붙는다/ 시뻘건 화염이 치솟는 그 속에서/ 반일하는 대중의 함성이 인다/ 나가라 싸우라 항일의 병민들/ 모두다 전선에서 나가 싸우라
— ‘총동원가’에서

세 번째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우는 항일투사들의 숭고한 품성을 찬미하고 철창 속에서도 굴함 없이 싸우는 항일투사들의 혁명정신을 구가하는 작품들이다. ‘붉은 군인이 되련다’, ‘끓는 피는 더 끓어’, ‘혁명군의 노래’, ‘연길감옥가’, ‘유격대 추도가’ 등이 대표적이다.

남북만주 설한풍 휩쓰는 산중에/ 결심품고 떠다니는 우리 혁명군/ 천신만고 모두다 달게 여기며/ 피와 땀 흘린자 그 얼마더냐/ 몽골사막 지동치듯 거세찬 바람/ 사정없이 살점을 떼여 갈 때에/ 삼림속에 눈 깔고 누워 잘 때면/ 끓는 피는 더욱더 뜨거워진다/ 지친다리 끌고서 보보행진코/ 주린 배를 졸라매고 힘을 돋군다/ 무정하다 세월은 흘러가는데/ 목적하는 혁명사업 언제 이룰까
— ‘혁명군의 노래’에서

네 번째는 여성 해방을 고취하고 고국과 고향을 노래하며 부모 형제와 님을 그리는 작품들이다. 이런 가요들에는 항일투쟁에 나선 일반 군민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주목된다. ‘녀자해방가’, ‘리혼가’, ‘망향가’, ‘어머님 생각’, ‘고향수심가’, ‘이향가’, ‘님 찾아가는 길’ 등 가요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 고향을 떠나온 후/ 시베리아 찬바람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정처 없이 떠다니네// 나를 낳으신 나의 부모/ 나를 위해 눈물짓고/ 나도 역시 부모 위해/ 슬픈 눈물 흘리누나// 창검을 빗겨들고/ 활무대에 나섰으니/ 배주림과 주야 산림/ 고생인들 여북하랴// 옛동산을 등에 지고/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아침이면 인간촌에/ 저녁이면 수풀 속에// 수풀 속에 들어누워/ 나의 신세 생각하니/ 자연조차 솟는 눈물/ 옷깃을 적신다// 류수 같은 이 세월아/ 초토 같은 인생들아/바람결에 쓰러지면/ 나의 신세 그만이다
— ‘망향가’ 전문

항일가요는 중국 동북과 화북지역에서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맹렬하고 처절하던 1930년대와 1940년 전반기에 대부분 창작되었다. 이 시기 항일가요는 사실주의 창작방식에 따라 그 시대의 본질을 진실하게 반영하면서 혁명적 낭만성을 선명하게 나타냈다. 항일가요는 또한 조선어의 특성에 따라 비유와 형용어, 상징법과 과장법, 대조법과 수사학적 질문법 등 다양한 수법들을 동원해 사상적 예술적 감화력을 높인 흔적이 역력하다. 항일가요에는 모호한 표현이나 까다로운 문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조선말 어휘와 인민대중이 늘 쓰는 구두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항일가요의 언어는 평이하고 소박하며 정론성과 경향성이 선명하다. 이런 언어를 바탕으로 대부분 항일가요는 밝고 명랑하고 전투적인 시적 운율로 차 넘치고 있다.

항일가요는 또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창작된 가요로서 하이브리디티(hybridity), 즉 문화 혼종성(混種性)의 특징을 다분하게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녀성해방가’, ‘자유가’를 비롯한 항일가요는 러시아나 소련의 민요와 가요에서 곡을 빌려온 것이고 ‘메데가’는 중국 북방지역 한족들이 오랫동안 전승해온 ‘양걸춤(穰歌舞)’의 곡조에 5ㆍ1국제로동절의 유래와 항일 내용을 담을 가사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용진가’는 조선 계몽기의 창가 ‘학도가’의 곡조에 가사를 붙인 것이지만 ‘학도가’는 또 일본의 ‘철도가’에서 선율을 빌려온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직업적인 작곡가나 시인이 없었던 상황에서 조선인 항일투사들은 조선민족의 기존가요의 형식이나 타민족의 민요나 가요의 곡을 빌려다가 항일투쟁의 내용을 담은 가사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항일연극

1930년대에 북간도를 중심으로 항일유격구와 항일유격대들에서는 항일가요가 널리 보급됨과 아울러 대중적인 연극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한 재중 조선인 희곡문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간도 도처에서 조기 사회주의단체들이 활약했고 새로운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는바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항상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고 그 시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극문학은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조선인들이 집거하는 용정에 ‘문우사’, ‘예우사’, ‘청년호’ 등 연극단체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 공연된 연극들은 내용상 대부분 가난한 조선인 농민들의 비참한 운명과 그들의 자연발생적인 반항 투쟁을 표현하거나 일제 침략자들에 대한 증오와 항거의 정신을 표현하였으며 그밖에 문명개화의 절박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작들로는 <경숙의 마지막>, <어디로 갈 것인가>, <야학으로 가는 길>, <파랑새>, <괴상한 청년>, <학우지정>, <안중근> 등이다.

<야학으로 가는 길>은 문맹 퇴치의 필요성을 해학적인 수법으로 주장한 연극으로서 1920년대뿐만 아니라 그 후 항일시기와 해방 직후까지도 자주 공연되어 문화·교양적 역할을 했다.

연극 <파랑새>는 강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파랑새가 큰물에 보금자리를 잃고 새끼들을 날개에 실어 하나하나 날아가는 이야기인데 마지막 새끼 한 마리까지 다 날아가는 데서 끝난다. 이 연극은 일제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온 만주 조선인들의 불우한 운명을 상징적 수법으로 보여준 작품으로서 당시 수많은 관중의 가슴을 울렸다.

이러한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1930년대 들어서면서 항일유격근거지의 인민정권과 민중단체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단체들을 설립해 유격대와 민중 속에 들어가 많은 연극을 공연하였다. 이 시기 항일유격대의 전투승리, 명절 및 기념일을 계기로 공연이 펼쳐졌고 유격근거지나 항일유격대 및 학교들을 순회하면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공연된 대부분의 연극은 항일유격구의 군민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창작되었다. 극본창작자들은 항일가요의 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항일투쟁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해 공연했다.

당시 항일유격근거지에서 공연된 연극들은 그 소재 면에서 항일투쟁의 현실반영이 특징적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①헐벗고 굶주리는 가난한 농민들의 계급적, 민족적 각성 과정을 그린 <4ㆍ6제>, <굶주린 사람들의 탄식>, <화전민> 등, ②항일투쟁 초반기 여러 형태의 반일구국투쟁을 반영한 <유언을 받들고>, <아버지는 이겼다>, <혁명가의 안해(아내)>, <그가 찾은 길>, <복수>, <용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엿물벼락> 등, ③항일무장투쟁의 본질적 특징을 반영하고 반제투쟁에서 대중들의 단결과 국제적 연대성의 중요성을 보여준 <혈해지창>, <싸우는 밀림>, <결의 형제>, <아버지와 남편을 찾는 사람들>, <한길> 등, ④일제와 그 주구들의 허장성세와 그 패배의 꼬락서니를 폭로 조소하면서 항일투쟁의 필연적 승리의 미래를 보여준 <경축대회>, <게다짝이 운다>, <혼나간 오장>, <미련한 순사> 등, ⑤현실투쟁 속에서 점차 반일의 길에 나서는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한 <한 지식인의 각성>, <용정의 고학생>, <징벌> 등, ⑥몽매한 미신관념과 봉건적 페습을 풍자하고 비판한 <굿과 약>, <무당과 의원>, <풍수쟁이>, <귀신굴>, <민며느리>, <우는 마당>, <강제결혼>, <매혼> 등등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창작되고 공연된 50여 편의 연극들은 당시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거의 다 소실돼 대본이 전해지지 않았고 항일투사들의 역사적 기억에 근거하여 대본의 내용과 구조를 복원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연변대학교에서 조선족 문학자료 수집 팀을 구성하여 동북 각지에서 항일가요와 항일연극 등 항일문학 작품을 광범위하게 수집했는데, 항일연극 <혈해지창(血海之唱)>과 <싸우는 밀림>은 바로 이번 수집 활동에서 발굴된 대본이 완전한 연극작품이다. 이 두 연극은 모두 1938년에 창작되었으며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뚜렷한 현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의 발전과 변천 궤적 및 그 핵심 특징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북간도 한국독립군부대와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추적과 토벌을 강화했으며 서간도와 북만주까지 파급되었다.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만주 전 지역 조선인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투쟁은 침체기에 빠져 거의 지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1930년 봄, 중국 내 사회주의 계열 조선인들은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상황에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대거 전입했다. “9·18 사변” 이후, 중국공산당은 만주지역 항일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지도를 강화했고 이로써 중국은 국지적 항전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로 접어들었는바 그 이후 중국인과 조선인이 연합하여 결성된 항일무장부대는 십여 년간 일제와 피어린 항전을 벌였다.

1930년대 초반 만주지역에는 십여 개의 조선인 항일유격대(빨치산부대)가 조직되었는데, 주요 부대를 보면 반석항일유격대(이홍광, 1931), 훈춘항일유격대(강석환, 1932), 연길현항일유격대(박동근, 1932), 왕청항일유격대(양성룡, 1932), 안도항일유격대(김일성, 1932), 요하민중반일유격대(최용건, 1933) 등이다. 그 이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만주 조선인 항일무장부대는 1933년 하반기에 동북인민혁명군에 편입되었고, 1936년에는 다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되었다. 1937년 말까지, 동북항일연군은 총 11개 군단, 총병력은 3-4만 명에 달했다. 동북항일연군에는 조선인 고급장령들이 다수 있었는데 군단장급 장령이 10여 명, 사단장급 장령이 40여 명에 달했다. 소대장, 중대장급 장교와 일반 병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과 만주지역 내 중국공산당 각급 조직에 조선인 공산당원 비중도 상당히 높았는바 1930년대 초반에는 80% 이상 차지했다가 차츰 그 비중이 줄었다. 1936년, 중공 동만특위에서는 조선인 위주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했다.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다수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1로군 제2군은 두만강, 압록강 지역으로 전략적 이동을 단행하고 장백산 밀림 곳곳에 밀영(密營)을 설치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유격 투쟁은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지만, 이로 인해 일제의 광포한 보복을 초래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제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장백산 지역의 항일연군에 대해 대규모 토벌 작전을 펼쳤다. 따라서 대부분의 항일연군은 더욱 깊은 심산밀림 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이로 인해 식량, 소금 등 생활 필수 물자가 끊기는 등 극히 간고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지만 일제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밀영”은 항일연군이 장백산 지역에 설치한 밀림 숙영지를 의미하며, “혈해”는 일제가 항일유격구와 항일연군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피의 바다로 변한 상황을 가리킨다.

연극 <싸우는 밀림>(전 5장)은 까마귀라는 필명으로 창작된 연극작품인데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1938년 이른 봄에 일어난 사건을 진실하게 다루고 있다. 연극의 주인공은 항일연군 군수부장 박민과 그의 아내 계순이다. 박민은 왜놈들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했지만 밤낮없이 복수할 일념으로 가슴을 불태운다. 그의 아내 계순이는 임신한 몸으로 지하투쟁을 견지하던 중 해산하는데 반역자의 밀고로 일제놈들에게 체포돼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형벌을 받는다. 이 작품은 일제와 굴함 없이 싸우는 항일투사의 형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연군의 습격전에 걸려들어 일장기를 끌어안고 자살하는 가와모도 중위와 같은 왜놈의 형상도 핍진하게 그렸다. 그리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연군을 도와 나섰다가 장열하게 희생되는 중국인—왕노인의 형상도 창조함으로써 중조인민의 연대성과 항일통일전선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싸우는 밀림>은 필사본으로 발굴되었는데, 인물 형상의 창조, 연극의 구성과 언어 등에서 일부 미흡함을 보이고 있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진실을 극적으로 생동하게 펼쳐 보인, 이 시기를 대표하는 연극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연극 <혈해지창>(2막 1장, 까마귀 작)은 1937년 일제가 “7ㆍ7사변”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발동한 이래 만주 항일투쟁이 날로 엄혹해지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동북항일연군 유격대원 조선인 뻐꾹새와 쑹마마(宋媽媽)라는 중국인 송씨 여인 그리고 그의 아들 왕평 등 항일영웅의 형상을 부각했는데 항일무장투쟁의 본질적 특성을 서사시적 화폭으로 그려냈다.

피바다 북간도야
우리네 상처받은 가슴 속에서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노래를 듣노니
백성들이여
이것이 혈해지창의 연극이노라!
— <혈해지창> 서막에서

이렇게 서막을 연 장막극 <혈해지창>은 인물 형상의 비극성과 진실성을 살리면서도 혁명승리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으며 첨예한 갈등에 토대한 극적 분위기를 창출해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극중 인물의 대사가 평이하고 생동하며 비유와 과장, 반의어와 상징 등 다양한 문체론적 수법을 사용해 작품의 형상성을 높이고 있다.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이 두 대표적인 항일연극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재중 조선인들과 항일무장부대 조선인 부대원들이 중국과 중국 혁명에 대한 정체성 확립과정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정체성의 이중적 특질을 진실하게 나타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조선인 이민자들이 점차 중국을 자신들의 새로운 삶터와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영위하기 위해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연극으로 생동하고 진실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싸우는 밀림> 제1장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피땀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개간해 얻은 새로운 삶터를 지극히 소중히 여기고 일제가 이 새로운 고향을 피바다로 만들려는 데 대해 극도로 분노하면서 단호히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박로인: 옳수다. 우리 만주에 와서 손에 피고름이 맺히도록 나무를 찍어다 기둥을 세우구 뒤밭을 옥답으로 만들어 겨우 이뤄놓은 이 터전을 우리는 목숨으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수다. 왕로인: 그렇수다. 어제날은 낙동강에서 고기를 낚구 청천벌에서 농토를 다뤘지만 오늘은 이 땅에서 내 피를 뿌려 씨앗을 가꾸었으니 예가 바로 내 고향이우. 속담에 제 집에 벗이 찾아오면 후한 대접을 하구 승냥이가 기여 들면 렵총으로 맞으란 말이 있잖소? 자, 징을 두드리우. 온 마을 남녀로소를 모이게 하여 이 방을 보게 합시다.
— <싸우는 밀림>에서

고향 의식의 새로운 변화는 그들로 하여금 깊은 산속 “밀영”에서 일제와 싸우는 항일유격대에 생활 물자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일제를 물리치는 투쟁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항일유격대가 일본 군경과 그 주구들을 타격하는 것을 도우도록 했던 것이다. 일제의 농촌 대토벌을 앞두고 연극에 나오는 다른 한 인물인 김로인은 “내 발에 미투리를 신었구, 내 손에 괭이를 쥔 한 제 땅과 같이 살구 제 땅과 같이 죽어야지요.”라고 한다. 보다시피 그들은 이미 일제와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이 연극에서 머나먼 이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제2의 고향의 주인이 되고 더 나아가서 중국 항일투쟁의 주체역량으로 성장하는 역사적 변천을 읽을 수 있다.

이상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의 항일가요와 항일연극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시기 중국 관내 여러 지역, 특히 화북과 화중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과 광복군에서도 문학활동이 전개되고 가요, 연극 등 여러 장르의 항일문학 작품이 창작되었는데 편폭의 제한으로 약한다.

2. 광복 후 30여 년간 조선족 항일문학

1945년 8‧15 이후 장개석의 국민당은 직전에 체결된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소련홍군으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을 공식으로 접수하기 시작했는데 중국 공산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국민당은 요원들만 파견해 대도시부터 장악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연안과 관내로부터 수천 명 간부를 파견하는 동시에 화북과 산동 지역에 있던 10여 만 명에 달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을 급파해 동북의 농촌지역과 중소도시부터 장악하고 나섰다. 이에 앞서 소련홍군 원동88여단으로 개편되었던 동북항일연군 수백 명 장병이 소련홍군을 따라 동북 여러 지역으로 돌아와 관내에서 온 간부들과 합류해 인민정권 수립에 착수하는 한편 10만 대군을 토대로 동북인민자치군을 설립해 광활한 동북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치열한 쟁탈전 속에서 광복 직후 2~3개월 동안 동북 각지는 지방정권 교체가 빈번하거나 정권 공백기가 생기는 등 일대 혼란 속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혼란 시국을 틈타 동북 각지 도처에 토비(마적)들이 들끓었는데 조선인들에 대한 약탈과 박해가 단행되고 그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 그리고 국민당정권도 193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이고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조선인들에 대해 귀화 정책 대신 구축(驅逐) 정책을 실시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자신들의 두 손으로 개척한 만주 땅을 떠나 조선반도로 돌아갔는데 210만여 명이던 조선인 인구가 110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광복 2~3개월 후부터 조선인이 거주하는 대부분 지역은 중국공산당의 세력범위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는데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은 동북근거지의 창설, 민주정권 수립과 토지개혁, 토비 숙청에 적극 참여했다. 수많은 청장년이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민주련군(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 야전군으로 개편)에 가입해 국민당 군대와 피 흘리며 싸웠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3년 해방전쟁(국공내전)은 자신들이 개척한 땅과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자위전쟁(自衛戰爭)이나 다름없었는바 이는 조선인들이 항일투쟁에 이어 중국 국민으로서의 자격과 정체성을 획득하는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되면서 재중 조선인들은 중국조선족이라는 중국공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받아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고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새중국 건설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변혁 속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광복 전 조선인 이민문학은 두 갈래의 큰 흐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제 식민통치구역에서의 문인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근거지와 중국공산당 영향하에서의 항일문학이다. 광복 후 문인문학의 중견작가들이 대부분 조선반도로 돌아가면서 문인문학의 계보가 중단된 상황에서 재중 조선인문학은 작가대오의 형성은 물론 창작 이념상에서 항일문학을 비롯한 “혁명적 문학”을 계승하고 발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새중국이 창립되기 전까지의 4년은 그러한 이념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광복 후 4년간(1945-1949) 조선인 항일문학

일제의 패망과 함께 기나긴 망국노의 삶을 종식하고 잃어버렸던 말과 글을 되찾은 재중 조선인들은 각항 민주개혁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문화계몽운동도 힘차게 추진했다. 따라서 조선민족의 새로운 삶과 미래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고 표현하는 민족문학도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들어섰다. 이 가운데 연극문학은 대중적인 성격을 계속 확보하면서 전례 없는 활기를 보이며 발전하였다.

이 시기 조선인이 집거하는 여러 지역에 문예단체와 극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문예지와 신문들도 많이 창간돼 연극문학의 발전에 유력한 환경을 조성했다. 연변에 동라문인동맹, 목단강에 동북신흥예술가협회가 발족되고 『연변일보』(연길), 『인민신보』(목단강), 『민주일보』(하얼빈), 『단결일보』(통화) 등 신문과 『불꽃』(연길), 『민주』(연길), 『연변 문화』(연길), 『해방』(목단강), 『건설』(목단강), 『효종』(녕안) 등 신문과 잡지가 간행되었다. 이 시기에 연변지구에서만 이스크라(불꽃)(연길), 애문연극사(훈춘)를 비롯한 20여 개의 연극단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공연된 연극은 80여 종인데 그중 자체 창작 연극이 50여 종 된다.

이 시기의 극문학 작품들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각항 민주개혁의 거대한 의미와 그로 하여 펼쳐진 거창한 현실을 다양한 극적 갈등과 인간관계를 통하여 민감하게 반영하였고 항일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조선인들의 항일투쟁도 형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연극들로는 연변지구에서 공연된 장막극 <승리의 혈사>(김평, 천일, 신영준 작), <해란강>(박노을 작), 목단강 일대에서 공연된 장막극 <밀림의 고백>(리한룡 작), <광명>(황봉룡), <너?! 이놈>(신룡검, 김태희 작), 하얼빈에서 공연된 장막극 <태항산의 혈적>(최채 작), <우리의 맹세>(장만련 작), 통화 반석 일대에서 공연된 장막가극 <민주련군 오는 날>(최정연 작) 등등이다.

이 가운데서 장막극 <승리의 혈사>와 <밀림의 고백>, <너?! 이놈> 등 세 작품은 중국 조선민족희곡 문학발전의 비약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장막극 <승리의 혈사>는 항일무장투쟁시기 ‘해란강대혈안’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1932년과 1933년에 일제는 용정 해란구 화련리 일대에서 94차의 ‘토벌’을 감행하여 천7백여 명의 항일투사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고 수십 개의 조선인부락을 폐허로 만들었다. 1946년 10월 연길시 인민광장에서 ‘해란강대혈안청산대회’가 사흘간 진행되었는데 만여 명 군중들이 모여 피해자 가족들의 공소를 들었으며 ‘대혈안’에 직접 가담했던 조선인 일제 앞잡이 18명이 재판을 받고 처단되었다. 연길 이스크라극단은 이 청산대회가 진행되던 기간에 ‘대혈안’을 다룬 장막극 <승리의 혈사>를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이 장막극은 일제와 그 주구들에 대한 공소에만 그치지 않고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이 자발적 단계로부터 조직적인 투쟁으로 전변되는 역사과정을 보여주었던 바 역사적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장막극 <밀림의 고백> 역시 ‘해란강대혈안’을 다룬 작품이다. ‘대혈안’ 때 수많은 항일투사와 조선인들을 투옥 학살한 일제 앞잡이 림남두의 박해를 받아 죽게 된 심영복이가 림가놈 등의 죄악을 적어 유리병 속에 넣어 밀림 속 땅 밑에 깊이 파묻어두었던 것이 나중에 그의 아내에 의해 알려지고 ‘대혈안’ 이후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혁명간부 대오에 혼입했던 림남두가 끝내는 인민의 심판을 받는 과정을 그린 연극이다. 이 작품은 림남두 등 일제 앞잡이들의 형상을 진실하고도 심각하게 부각함으로써 일제와 그 주구들의 추악한 죄악상을 깊이 있게 폭로하고 단죄하였는데 당시 열렬하게 전개되었던 악질지주와 한간(친일부역자)을 청산하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해 조선인이 집거하는 여러 지방에서 공연돼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장막극 <너?! 이놈>은 조선의 원산, 중국의 하얼빈과 목단강을 무대로 비교적 방대한 구성을 가진 연극작품이다. 연극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조선과 만주를 넘나들며 벌어지는가 하면 시간적으로는 광복 전의 사건으로부터 광복 후의 현실까지 다루고 있다. 인물관계와 사건은 항일투사 리동철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과 남원수를 비롯한 친일부역자들 지간의 모순과 갈등을 주요 줄거리로 이끌어가면서도 여러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와 드라마틱한 여러 사건이 얼기설기 얽혀서 전개되고 있다. 이 연극작품은 첨예하고도 복잡한 극적 갈등과 사건 전개 그리고 생동한 대사로 여러 인물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는 바 이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정신 그리고 자유와 해방의 길을 찾게 되는 간거한 투쟁 여정을 진실하게 보여주었다.

이상 세 연극작품 가운데 <너?! 이놈>만 대본이 완전하게 남아있고 다른 두 작품은 대본이 소실되었다.

새중국 창립 후 17년간(1949-1966) 조선족 항일문학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판도에 편입돼 새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환경의 제약과 영향을 한결 강렬하게 받았다. 이 시기 작가 군체는 해방 후의 사회,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재조합이 이루어지며 작가층의 부단한 교체가 이루어졌다. 조선의용군을 비롯한 혁명군인 출신과 부분적인 교원 출신의 문인들이 문단의 중심부에서 주요역할을 하였으며 워낙 많지 않은 광복 전 이민문단의 작가들은 문단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 “반우파투쟁”과 그 후의 비판운동에서 새중국 창립 후 제1세대 작가들과 지도자들이 대부분 “우파”로 지목돼 정치권리와 창작권리를 박탈당하고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 문단에 데뷔한 새로운 작가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1966년부터 10년 동안 지속된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는 제2세대의 중견작가들마저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중국문학은 당과 정부의 정치적 과업을 실현하는데 보조를 같이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쓰는가 하는 제재의 취급뿐만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창작방법과 예술품격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규범”을 따라야 했다. 따라서 중국조선족문학도 사회본질 반영론, 전형적 환경하에서의 전형적 성격 창조, 인물 형상의 이상화와 낙관적인 전망과 미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사실주의 창작방법을 유일한 창작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1958년에 이르러 모택동이 “혁명적사실주의와 혁명적낭만주의 상호 결합의 창작방법”을 제기하면서 점차 이 방법으로 사회주의사실주의 창작방법을 대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문학은 시문학, 소설문학, 극문학이 함께 발전하며 일정한 성과를 보였는데 농촌제재(題材)와 전쟁제재의 창작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전쟁제제는 주요하게 항일전쟁, 국내혁명전쟁, 항미원조(한국전쟁) 등이다.

이 시기 조선족 항일문학의 대표작으로는 장막극 <장백의 아들>(황봉룡, 박영일 작)이다. 1959년 10월호 『연변문예』에 처음 발표되고 그해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1930년대 장백산지구 항일무장투쟁을 배경으로 항일유격대의 지하공작원인 박철의 영웅적 형상을 창조하면서 당시 항일투쟁 현실을 폭넓게 재현하였다. 아슬아슬한 지하투쟁의 세부, 간고하면서도 낭만에 넘치는 항일유격대원들의 생활, 친밀한 항일군민 관계, 형제민족 간의 단합과 친선, 진지하고도 열렬한 애정 등 그 시대 조선인 항일투쟁 역사를 진실하고 생동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시종 주인공 박철을 모순갈등의 초점에 세워놓고 꿈과 현실, 물질과 정신, 생명과 죽음, 필연과 우연, 사랑과 증오, 역사와 현실, 공개적인 투쟁과 비밀리의 투쟁이 충돌되고 교차되는 가운데 인물의 풍부한 내면세계와 항일투쟁의 가혹한 현실을 깊이 있게 표현하였다.

1950년대 말에 창작되고 공연된 이 장막극은 당시 정치 문화의 영향으로 양극 대립의 구조에 국한되는 등 시대적 낙인이 찍혀있긴 하지만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희곡작품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실존 인물의 실화에 근거해 창작된 이 장막극은 대중들 속에서 큰 인기를 누렸는데 20여 년 동안 476차의 공연횟수와 45만 5천여 명의 관중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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