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 목격담

62

[식민지 자료관 5]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 목격담

이순우 특임연구원

일제 패망 직전에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펴낸 『새로운 조선(新しき朝鮮)』(1944)이라는 선전책자의 첫머리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禿山の赤土山の山つづき 悲しき國をつくれるもの哉(벌거숭이 붉은 흙산의 산줄기가 슬픈 나라를 만든 것일까)”
일찍이 어느 가인(歌人)이 탄식했듯이 자토색(赭土色)의 민둥산과 빨래하는 백의부인(白衣婦人), 이것이 20년 전 혹은 10수년 전까지의 조선의 인상(印象)이자 슬픈 현실이었다. …… 일찍이 ‘슬픈 나라’라고 읊었던 가인은, 지금 이 싸우는 조선(戰ふ朝鮮)의 격렬한 기백과 늠름한 현실을 직시하고 과연 뭐라고 노래할 것인가. 조선은 전진(前進)한다. 그 목표는 단 하나 ‘황국일본(皇國日本)의 무궁(無窮)한 발전(發展)과 함께’ 조선은 전진한다. 당당(堂堂)하고, 또 역강(力强)한 2,600만 동포(同胞)의 밀물 같은 전진의 공음(跫音, 발소리)에, 우리 잠시 귀를 기울여보지 않겠는가.

여기에 “어느 가인(歌人)”이라고 적어놓은 이의 정체는 야마지 하쿠우(山地白雨, 1879~1914) [본명은 야마지 쥰이치(山地純一)]이다. 그는 현직 체신서기(遞信書記; 경성우편국 근무)이면서 이런저런 문필활동을 했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심장마비로 급작스레 죽자 절친했던 — 신문기자 출신이자 언론출판인으로 활동했던 —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8~1934)의 손으로 그의 유고문집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곧 『슬픈 나라(悲しき國を)』(1922)이다.

이 책을 뒤적이다 보니 「총형(銃刑)」이라는 제목의 글이 퍼뜩 눈에 띈다. 이것은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1904년 9월 21일 집행) 당시의 목격담인데, 러일전쟁 당시 이 땅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김성삼(金聖三), 이춘근(李春勤), 안순서(安順瑞) 등 3인의 조선인이 억울하게 ‘철도파괴범’으로 몰려 마포 공덕리 부근에서 공공연하게 포살(礮殺)로 처형된 바 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앞서 『민족사랑』 2019년 12월호에 게재한 「[식민지 비망록 53]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의 현장, 도화동 공동묘지 — 그들의 죽음은 어떻게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나?」를 통해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나, 그 당시에는 이 목격담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불찰이 있었다. 그것을 보충하는 의미도 있고, 더구나 — 그리 긴 내용은 아니지만 —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생생한 기록이니만큼 자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여 그 내용을 여기에 소개하여 두고자 한다.

야마지 하쿠우(山地白雨), 『슬픈 나라(悲しき國)』(1922), 「총형(銃刑)」(77~80쪽)

모월 모일(某月 某日) 마포가도 만리장(麻浦街道 萬里莊)에서 아무개 아무개 등(某某等) 한인(韓人) 3명(三名)을 군법(軍法)에 의해 총형(銃刑)에 처(處)함.
군사령관(軍司令官) 아무개(某)

이러한 의미(意味)의 고시(告示)가 경성(京城)의 요소요소(要所要所)에 첩출(貼出)되었다. 나[僕]는 소년(少年)이던 시절에 조부(祖父)에게서 누누이 마츠하라(松原)의 수참(首斬) 이야기를 듣고 미숙한 호기심(好奇心)이 솟구쳤던 일이 있었는데, 때마침 그 옛이야기를 지금의 세상에서 보는 것 같은 셈이었으므로 이날 아침 일찍부터 견물(見物, 구경거리)을 찾아 외출하였다.
만리장은 아직도, 봄에는 채소의 꽃들이 피며, 적막한 전중(畠中, 밭 사이)에 있는 것처럼 그 무렵은 한층 더 적막했던 야말(野末, 들판 끝자락)이었다. 버드나무 병목(並木, 가로수)이 가도(街道)의 뚝[堤]에서 흘러내려, 왠지 이러한 처형을 행하기 위해 약속(約束)된 토지(土地)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둘러보니까 형장(刑場)의 모퉁이에는 3본(本)의 십자가(十字架)가 오싹하니 돌립(突立)되어 있었다. 우리는 성서(聖書)에서 그 이름을 알았던 것 말고는, 이런 물건을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인데, 뭔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림을 금할 수 없었다.
어느 버드나무의 그늘에는, 한인(韓人)을 태운 3대(臺)의 손수레[車]가 운전손잡이[轅]를 내려놓고 있었다. 총(銃)을 어깨에 멘 수명(數名)의 병사(兵士)가 그 주위를 에워쌌고, 군집(群集)의 접근을 허락지 않았다. 그들이 죄수(罪囚)라는 것은 곧장 알려졌다. 보니까 3인(人)도 흰 두루마기(ツルマキ)를 입었고, 백포(白布, 흰천)로 굳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アイゴ궨 アイゴ궨 ) 하며, 가늘게 끊어져 사라지는 듯한 울부짖음이 장(腸)을 비트는 것 같이 들렸다.
11시(時)가 되었다. 이날의 지휘관(指揮官)인 듯한 한 사람의 사관(士官)이 포켓(ボケット)에서 시계(時計)를 꺼내어 무심코 병사(兵士)에게 명령(命令)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은 차부(車夫)를 재촉하여 죄수의 수레[俥, 인력거]를 십자가의 방향으로 끌고 갔다. 아이고 아이고, 부르짖는 소리가 점점 더 세게 들려왔다. 사람이 죽으려고 하는경색(景色, 광경)이여 ―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차마 보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십자가의 앞에서 수레는 멈췄고, 죄수는 수레에서 십자가의 위로 옮겨졌다. 아이고 아이고의 소리는 끝내 뼈에 사무치는 것처럼 울렸다.
병사는 죄수를 십자가에 붙들어 맨 후에, 50미돌(米突, 미터) 남짓의 이쪽에 일렬(一列)로 늘어섰다. 어깨에 멨던 총은 내려졌고, 호령(號令)에 따라 오리시키(折敷, 무릎쏴)의 자세를 취했다.
이 불안(不安)한 공기(空氣) 속에서, 푸른 휘장(徽章)을 단 2, 3인의 군의(軍醫)는 무슨 일이 있는 듯이 죄수의 근처를 왕복하고 있다.
여기까지 어쨌든 간에 보고 있던 나는 이때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안 좋은 기분을 느꼈던 것인데, 눈을 감고 다른 곳을 향하려 했던 찰나(刹那), 한 발의 총성(銃聲)이 귀를 뚫고 울렸다. 이어서 3, 4발(發), 아, 하고 생각하니 이내 산(山)에 코다마(木靈,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
잠시동안 나는, 어유(やや) 하는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렸고, 두려워하면서 눈을 떠서 보니까 무잔(無殘, 무참)한 세 개의 백의(白衣)의 표적은 생생하게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나의 뒤쪽에 있던 사진사(寫眞師)는 그 렌즈(レンズ)를 열었다.

야마지 하쿠우(山地白雨), 『슬픈 나라(悲しき國)』(1922), 「교외로(郊外へ)」(55~57쪽)
양복(洋服)의 신문기자(新聞記者)와 화복(和服, 일본옷)의 시인(詩人)은 종로(鐘路)에서 마포행(麻浦行) 전차(電車)에 올랐다. 이곳의 전차는 구(舊) 한국시대의 유물인 예(例)의 개방식(開放式)인 것이다. 3월말이라고는 하지만, 질주하는 차 위에서는 족히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분다. (중략)
전차는 어느 샌가 시중(市中)을 벗어나, 너른 들판 사이로 질주하고 있었다. 밭에는 뭔가 씨를 뿌려놓은 것인지 옅은 푸르름이 일면(一面)으로 펼쳐져 있었다. 눈을 들어보니 수정(數丁, 수백 미터) 저쪽에는 경의선(京義線)의 철도(鐵道)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리고, 그 너머에는 옅은 맹황색(萌黃色, 녹황색)으로 드러난 버드나무의 병목(並木, 가로수)이 안계(眼界)를 긋고 있다. 화복의 사내는 양복의 사내에게 말했다.
“저쪽 왼편으로 버드나무 가로수가 한가득 무성한 근처를 한번 봐봐. 저 옆에서 선년(先年, 몇 해 전) 일로전쟁(日露戰爭, 러일전쟁) 중 총형(銃刑)이 행해졌던 일이 있지.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져.”
이렇게 말하며, 그 당시의 모양(模樣)을 얘기했다. 버드나무 가로수 아래에 눈이 가려진 채 수레(車, 인력거)에 태워져 있던 죄인(罪人)은, 보고 싶어 찾아온 어머니와 최후(最後)의 몌별(袂別, 섭섭한 이별)을 허락받고 잠시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작별을 아쉬워하며 애절함으로 울부짖었다.
“그 이후로 나는 버드나무를 보면, 곧장 당시의 모습이 눈에 떠올라 견딜 수 없었어.”
화복의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이 주변은 별별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군.”
“그렇지. 철도선로(鐵道線路)를 따라서 눈을 동쪽으로 옮겨보게. 소나무가 무성한 얕은 언덕이 있을 것이야. 그 아래가 곧 대원군(大院君)의 묘(墓)가 있던 곳일세.”
전차는 두 사람이 얘기하는 사이에, 공덕리(孔德里)의 정류장(停留場)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하차하여 촌락(村落) 사이의 세로(細路, 가는 길)로 목표하는 숲을 향해 서둘렀다. (하략)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당시 일본군대가 저지른 총살형 장면을 이를 은폐하거나 비공개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그 광경을 찍게 하고 이를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널리 배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군사시설에 해코지를 하거나 자신들의 위력에 감히 맞선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무력과시의 의도가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보름여가 지난 1904년 11월 8일에 간행된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10권(박문관 발행)에는, 이내 ‘한국철도방해자의 처형’이라는 제목 아래 총살형 장면과 관련하여 넉 장의 사진자료가 함께 등장하였다. 여기에는 “8월 27일 한국 용산 부근에서 우리 군용철도에 방해를 가하여 체포된 비적(匪賊)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은 9월 20일 군법회의(軍法會議)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1일 오전 10시 마포가도(麻浦街道) 철도답절(鐵道踏切, 철길 건널목)의 좌측 산기슭에서 총살되었다”는 설명 구절이 붙어 있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 흩어져 수록된 이들 처형 장면을 다시 취합하면, 당초에 최소 9매 이상의 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포함된 일련의 사진들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세 사람을 인력거에 태워 처형장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석 장이고,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어 처형하기 직전 상황을 담은 것이 두 장, ‘무릎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두 장, 총살형 집행 후에 군의관이 검시(檢視)하는 광경이 두 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이 무렵에 나온 프랑스의 시사화보인 『르 쁘띠 빠리지엥(Le Petit Parisien)』 1904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사격연습」 제하의 기사에도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에 관한 내막을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사진에 관한 얘기가 등장하고 있다.

…… 본지 특파원은 즉석 사진 몇 장과 함께 참혹한 현장의 소식을 전하였다. 사진은 서울의 일본인 사진사들로부터 돈을 주고 쉽게 구한 것으로, 그들은 이 사진이 가져올 여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인근에 농부 세 명이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중 한 명은 과부의 아들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고, 모두 문맹인데다 아는 것은 없고 술만 마셔댔다고 한다. 생각 없이 행동하던 세 농부는 어느 날 저녁 서울에서 의주로 향하는 철도의 철로를 건넜다고 한다. 그런데 철로에서 선로변경장치를 발견하고는 신문물을 신기하게 여겨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장치가 상하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악의를 가지고 하였던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순찰중이던 일본 헌병이 다가와 다짜고짜 불쌍한 사고뭉치들을 검거해 서울로 호송하였다. 세 농부는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결백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범죄’ 현장에서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서울의 공인 사진사들을 인력거로 처형장까지 데려와 흥미로운 장면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묘지 언덕 아래에 흰 나무 십자가를 세워 불쌍한 세 농부를 각각 매달았다. 보병 12명으로 구성된 총살집행반이 60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증언하였다. 이런 경우 보통은 거리가 12~15미터가 일반적인데 60미터라니, 믿어지나요? 그런 다음 집행반 전체에게 그들을 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중 3명을 무작위로 골라 한 명씩 돌아가며 피해자를 조준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사형집행이 아닌 사격 경기로밖에 볼 수 없다.
불쌍한 농부 중 한 명은 첫발에 머리에 구멍이 나서 즉사하였다. 두 번째 농부는 총을 다섯 번 쏜 후에야 숨을 거두었고, 이미 총상을 입고 울부짖고 있던 세 번째 농부는 집행반이 50미터로 거리를 좁힌 후 총을 두 발 더 쏜 후에야 맞추는데 성공하였다. 일이 모두 끝나자 의사와 집행반 사령관은 마치 좋은 패를 들고 있는 노름꾼인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사형수들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재인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2017), 222쪽]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