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임종국상 수상소감]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언론 부문 수상자 이은지

당신은 임종국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전화 통보를 받고, 단박에 뇌리를 스친 생각은. ‘고객 맞춤형’ 피싱이구나. 네? 제가요?
임종국 선생이 누구인가. ‘친일역사 연구’의 개척자이자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일평생을 바친 위대한 학자이자 역사운동가 아니신가. 그런 분의 유지를 잇는 이 영광된 상을 받을 자격이 내게 있는가.
수많은 ‘부끄러움’이 수일에 걸쳐 가슴을 잠식했습니다. 이 부끄러운 감정의 뿌리를 찾고자 지난 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친일행위에 대한 참회와 반성, 발본색원이 없는 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다.” 임종국 선생이 남긴 유고입니다. 역사학자로서 느꼈을 부끄러운 감정을 감히 추측해봅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를 제작할 때 백하 김대락의 후손 김시중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3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 취재 중 마지막 질문. 증조부는 왜 ‘망명’을 선택했을까요. “나는 한 마디로 ‘부끄러움’이라고 봐.” 그는 또 백하 선생의 부끄러움을 다른 말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어른의 ‘염치’라고 칭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전해주던,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부끄러웠을 감정도 헤아려봅니다.
시인 윤동주도 그의 작품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럽지 않기를 기도하며 글을 적었지요.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괴로웠을 감정도 어렴풋이 가늠하려 애써봤습니다.
처음, 만주 땅을 밟았던 날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내적 각성’ 말입니다. 다큐 〈서간도의 별들 3500〉을 제작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옛터 답사에 동행 취재할 때의 일입니다. 분명 우리 역사 한가운데에 존재했던 사실을 찾아 나선 여정인데, 늘 헤맸습니다. 심지어 어디를 가든 ‘보존되지 않은’ 답사지에 입을 열 수가 없었고, 무엇을 듣든 ‘알지 못했던’ 빈약했던 역사 지식에 매 순간 목이 메었습니다. 고개 한 번, 제대로 들 수 없었던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작품을 제작하는 내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인데, 아무런 노력 없이 선조들이 치른 피의 대가로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 이에 대한 부끄러움과 빚진 마음. 더 크게는 그간 언론인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도덕적인 자책과 내적인 반성이 부끄러운 감정으로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배우 라미란과 작업했던 다큐 〈불온문서〉는 미주 이민 120주년을 맞아, 하와이에서 발견된 한 권의 노래집에 담긴 이민자들의 독립운동 이야기입니다. 노래집 ‘애국창가’에 실린 독립군가 중 다섯 편의 노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발표했는데, 이 중 ‘문어의 꿈’ 가수 안예은이 재능 기부로 ‘대한혼’을 불렀습니다. 왜 이 프로젝트에 선뜻 나섰냐는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아주 단순하다, 몰랐으면 알아가고, 알았으면 행동하는 거다.”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습니다.
2018년 겨울, 〈해간도 연가〉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최재형 선생의 손자 발렌틴 최를 만난 자리였습니다. 그는 오래 묵혔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강제이주’의 기억 때문에 대한인으로 살 수 없었던 지난날들과 독립운동한 선조들을 숨겨야만 했던 아픔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끝에서 남긴 말.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기록하다보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은 기억해주겠지”
사라져가는 ‘기록’에 대한 조급함이 시작된 것이 그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독립운동가분들을 찾아가고, 그 후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분들의 육성으로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대부분 남의 땅에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그중에 간혹. “우리 집 가보인데… 흙이예요” 항일음악가 한유한 선생이 남긴 고향 부산의 흙 한 줌을 만나기도 했고, 꼬깃꼬깃 이민자 후손의 낡은 태극기를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이 태극기는 하와이 애국단 김예준 지사의 아들 김영호 옹이 ‘아리랑’ 노래를 불러주며 보여준,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어보려, 국내외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습니다. 공식 취재가 아니더라도, 개인 휴가를 내어서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궤적을 좇아다녔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방송국인 JODK 경성방송의 방송 자료를 얻으려 일본측에 열 번이 넘는 거절을 당하자 제작진 몸에 여러 대의 녹음기를 숨기고 관광객인 척 취재가 불허된 곳에 접촉도 해봤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부를 줄도 모르는 독립군가가 악보 형태의 ‘노래집’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던 날. ‘이건 부르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생각에 그간 쌓아온 ‘라디오 피디’로서의 노하우를, 한동안 독립군가 복원 작업에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기록에 매달렸습니다. 10편에 가까운 장편 다큐멘터리와 수십 편의 특집 기획물을 제작했고, 70여 편에 이르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 육성으로 독립군가와 독립영웅들의 이야기를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기록을 하면 할수록 조바심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여전히 사적지는 보전되지 않았고, 생존해계신 독립운동가와 그 직계 후손들은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갔으며, 많은 분들이 영면에 들었습니다. ‘아. 아직 멀었는데. 이러다 사라지면 그땐 진짜 어떻게 하지.’
시대마다 언론인에게 요구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한인 최초의 언론인이었던 임시정부 충칭방송의 방송요원이나 광복군 초모활동원에게 어쩌면 그들의 사명은 목숨 건 독립운동이었을 겁니다. 민주화시대 선배들에게는 언론 탄압 폭거에 맞서 펜으로 싸우거나 펜을 놓는 투쟁이 사명이었겠지요.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실하게 쌓는 기록. 그 기록을 보다 많은 이들의 귓가에 머리에 심장에 닿는 날까지 말하고 또 말하는 것. 이것이 2025년의 언론인 이은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이자 선조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할부’로 갚는 대출상황의 행위일 것입니다.
저는 ‘진심’과 ‘진실’의 힘을 믿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심’을 갖고 ‘진실’을 성실하게 쌓다보면 언젠가 그 진실은 타인의 진심에도 와 닿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세 명의 진심이 모이다보면 또 언젠가는 시대와 세대의 진심에 닿아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故 발렌틴 최 선생이 남긴 유지와도 같은 말. “기록하다 보면 기억해줄 것이다.” 네, 기록하다 보면 기억해줄 겁니다. 그 기억이 우리의 역사 가 되어줄 거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에필로그 격으로 첨언하자면, 사실 개인적인 이유로 지쳐갈 시점이었습니다만 이렇게 임종국상 수상자가 되어버려서, 지칠 수도 없게 되었지 뭡니까. 빼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길에 때마다 시마다 함께해준 수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일일이 밝힐 순 없지만. 사랑하는 동지들에게 ‘이 상의 무게’를 나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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