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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소리]80년만에 ‘일제 블랙리스트’로 되살아난 제주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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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광복 80주년 맞아 독립유공자 37명 포상 신청

‘일제 블랙리스트’ 약명부에 기재된 제주 출신 현호진, 현호경 형제.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립유공자 추가 발굴에 나선 가운데, 제주 출신 노동운동가 현호진 등 37명의 항일운동가가 국가보훈부 포상 신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일제가 작성한 ‘요주의 인물 블랙리스트’ 약명부에 수록된 인물들로, 식민지 시기 일본 본토에서 활발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벌인 사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80주년을 계기로 연초부터 독립유공자 추가 발굴 조사·연구에 착수한 결과, 1차로 37명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밀 행적 검증을 완료하고 지난 6월 30일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발굴 대상은 202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약명부’에 실린 인물들이다. 1945년 3~4월 무렵 작성된 ‘약명부’는 일제 고등경찰이 요주의 조선인에 대한 인물정보를 각 도별로 정리해 일본과 조선 등지의 보안 관계자 그리고 연안·국경 지역의 경찰서와 헌병대 치안 책임자에게 배포한 문서철이다.

총 790명의 신상 정보와 함께 당시 주소와 직업, 항일 행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일제판 블랙리스트라 불릴만한 약명부는 역설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을 입증할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중요자료로 꼽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약명부 검토 결과 이중 168명은 서훈됐으나, 독립운동 업적이 명백하고 흠결이 없는 상당수가 포상에서 빠져있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1차로 전라남도 관할 인물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했고, 친일 행적이 확인되거나 해방 후 행적이 논란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제외한 37명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약명부에는 제주도 성산면 성산리 237번지를 본적과 주소로 둔 현호진(1908~?), 현호경(1910~?) 형제가 나란히 기록돼 있다.

최초 형제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여동생 현호옥(1913~1986)과 함께 언론에 등장하면서다. 현호옥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고, 2019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현씨 남매의 아버지 현길홍은 1930년대 오사카-제주 간 일본 기선의 횡포에 맞서 ‘우리 배는 우리 손으로’라는 기치 아래 여객선을 띄웠던 동아통항조합의 조합장을 지냈고, 현호진과 현호경도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벌였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1895~1945)’의 ‘동아통항조합’ 항목을 찾아보면 식민지 시기 제주 사람들의 일본 도항(渡航), 제주와 오사카 사이의 정기 항로, 고액 운임과 나쁜 대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조선 사람 손으로 정기여객선을 운영하려는 운동 등이 확인된다. 현길홍은 민족교육기관인 나니와야학원도 운영했다.

현호진 삼 남매는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케이스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삼 남매는 아버지와 더불어 재일조선인들의 생존, 노동계급의 권리 확보를 위해 분투했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에 따르면 현호진은 1933년 ‘전협토건 간사이지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는 언급이 있다. 또 약명부 기록을 추적하면 현호진과 현호경은 1925년 10월에 일본에 건너갔고, 현호진은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전협화학 오사카지부, 전협화학 효고현지부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33년 4월 체포됐는데, 기소되지는 않고 두 달 만에 풀려났다.

현호경은 전협화학 오사카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공산당에 입당, 1933년 5월에 체포돼 1935년 1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복역했다. 약명부는 두 사람이 1945년 현재 제주도 고향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다만,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현호경은 포함되지 못했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는 현호경이 “해방 후 귀국해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했고, 1946년 12월 결성된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에 가입하여 지도부로 활동했다. 남로당의 3·1 사건 대책 위원회의 조사부장을 담당했다. 남로당 목포시당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9년 암살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구소는 현호진 가족의 사례처럼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 건너가 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확인했다.

또 다른 제주 출신 인사인 윤석원은 제주에서 청년운동, 사회주의 사상운동을 전개한 이른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8년 8월 검거돼 1930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1931년 8월까지 복역했다.

1932년 5월 제주경찰서에 체포돼 ‘제주도 비밀결사, 일명 제주 혁우동맹 사건’으로 기소돼 1933년 6월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풀려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윤석원의 혐의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약탈해 식민지로 삼고 농민을 압박하고 착취하므로 조선인이 결속해 혁명적으로 투쟁할 것 등 과격한 좌익운동방법이 기록된 원고를 전달받아, 이를 옮겨 써서 잡지에 게재해 사회에 발표하려고 협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는 경찰과 검찰 조사, 예심을 거쳐 1심 재판 때까지 그대로 인정됐다. 그렇지만 2심 재판부는 부탁을 받아 일부를 옮겨 적다가 그만두고 돌려보냈다는 윤석원의 진술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원고를 옮겨적었다는 증거물의 필적이 윤석원의 것과 다르다는 점, 예심 조사에서 원고를 옮겨 적었다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일제 재판부는 윤석원의 형사보상청구를 기각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서훈 신청에 포함된 인물들의 항일 행적은 물론 결격 사유가 될 만한 부일협력행위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검증했으므로 국가보훈부의 서훈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하리라 본다”며 “연차계획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사·연구를 진행해 발굴보훈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박성우 기자

<2025-08-04> 제주의소리

☞기사원문: 80년만에 ‘일제 블랙리스트’로 되살아난 제주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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