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새긴 목포근대역사관(2관)의 ‘팔굉일우비(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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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6]

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새긴 목포근대역사관(2관)의
‘팔굉일우비(1940년)’
‘팔굉일우’라는 용어의 본격 등장은 중일전쟁 직후의 시점

이순우 특임연구원

불은 하나나/ 밝음은 가득하외다./ 한 낱의 생각이/ 억만의 마음을 감기고/ 구원할 것입니다.//
종은 집속에 우나/ 온 땅에 퍼집니다./ 한 낱의 곡조가/ 만 나라의 걸음을/ 어우를 것입니다.//
한 낱의 생각이/ 예부터 있고/ 한 낱의 이상이/ 기어코 올 것입니다./ 그 깊이를 모릅니다./ 그 넓이를 모릅니다,/ 그 높이를 모릅니다,/ 그 멀기를 모릅니다./ 모르도록 그 나타남이 어수선하외다.//
시방 우리는 총을 들고/ 시방 우리는 칼을 잡고/ 시방 우리는 싸우고/ 시방 우리는 문흡니다./ 그러나 나중은 총을 거두리라./ 칼을 꽂으리라./ 사랑이 다스리리라.//
혹은 웃을 것이고/ 혹은 뮐 것이고/ 혹은 막을 것입니다./ 마는 웃는 이는 놀랄 날이,/ 뮈는 이는 반 길 날이,/ 막는 이는 업델 날이/ 머지 안하외다.//
불은 하나나/ 억만 등을 켭니다./ 생각은 하나나/ 억만 구원을 이룹니다.//
한 낱의 생각이/ 예부터 있고/ 기어코 올 것이외다./ 음을 새기지 못합니다./ 뜻을 풀지 못합니다./ 아직 우리는 알기보다도/ 바랄 뿐이외다./ 우리의 아들들은 알 것이외다./ 우리의 손자들은 누릴 것이 외다.//
아직 우리는 바랄 뿐이외다./ 한 낱의 생각을./ 한 낱의 광명을.//

이것은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게재된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제목의 친일시이다. 여기에 나오는 ‘한 낱의 생각’이나 ‘한 낱의 이상’, 그리고 ‘한 낱의 곡조’와 ‘한 낱의 광명’은 모두 언젠가는 기어코 달성되기를 기원하고 또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는 팔굉일우의 이상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글의 작자는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이며 그의 창씨명인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는 ‘팔굉일우’에서 그대로 따온 흔적이 역력하다.

이 용어는 일본의 조국정신(肇國精神, 건국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팔방(온 세상)이 하나의 집을 이뤄 천황의 치세에 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출처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3(卷第三) ‘신무천황(神武天皇; 진무천황)’ 기미년(己未年, 기원전 662년) 3월 정묘조(丁卯條)에 나오는 이른바 ‘카시하라(橿原) 전도(奠都; 도읍을 정하는 것)의 대조(大詔)’이다.

여기에는 “兼六合以開都, 掩八紘而爲宇 不亦可乎”라는 구절이 있으며, 이는 “육합(六合, 천지사방)을 아울러 도읍(都邑)을 열고, 팔굉(八紘, 사방팔방)을 덮어 집으로 삼으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정도의 뜻으로 풀이된다.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팔굉위우(八紘爲宇, 핫코이우)’이며, 다시 1904년에 이르러 일련종(日蓮宗) 계통의 재가불교운동가인 타나카 치가쿠(田中智學)에 의해 ‘팔굉일우(八紘一宇, 핫코이치우)’라는 표현이 창안되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팔굉일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널리 보급된 때는 1937년에 일어난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직후의 시점이었다. 식민통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시체제기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시국(時局)의 변화에 대처할 각오와 결심을 단단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할 표어(標語)나 구호(口號) 같은 것이 매우 긴요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매일신보』 1938년 3월 15일자에 수록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성지(聖旨), 보급철저(普及徹底)에 주력(注力), 본부(本府)에서 통첩발송(通牒發送)」 제하의 기사에는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운동(國民精神總動員運動)’의 확산과 맞물려 이 시기에 ‘팔굉일우’의 관념이 전면에 부각되게 되는 배경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총독부(總督府)에서는 내(來) 4월 3일의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를 기(機)로 정부(政府)와 상호응(相互應)하여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을 실시(實施)하기로 되었는데 시(時) 마침 반도시정사상(半島施政史上) 획기적 시조(劃期的 施措)인 개정 조선교육령(改正 朝鮮敎育令) 병(並) 육군특별지원병제도(陸軍特別志願兵制度)의 실시기념축하회(實施記念祝賀會)가 전선(全鮮) 일제(一齊)히 거행(擧行)될 일(日)임에 감(鑑)하여 차일(此日)을 기(期)하여 신무천황 즉위건국(神武天皇 卽位建國)의 대조중(大詔中)의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성지(聖旨)를 천명(闡明)하여써 반도(半島) 이천삼백만(二千三百萬) 민중(民衆)에게 아 제국 조국(我帝國 肇國)의 대이상(大理想)을 보급철저(普及徹底)케 함은 견인지구(堅忍持久), 장기대전(長期對戰)의 시국(時局)에 처(處)할 국민(國民)의 각오(覺悟)와 결심(決心)을 더욱 강고(强固)케 하는 데에 또 가장 유의의(有意義)함으로 좌(左)의 신무천황 조칙중(神武天皇 詔勅中)의 성지(聖旨)를 보급철저(普及徹底)케 하기로 되어 14일 제1차(第一次) 소속관서(所屬官署) 각공사립전문학교(各公私立專門學校) 병(並) 관계 각 방면(關係 各方面)에 각각(各各) 통첩(通牒)을 발(發)하였다. (하략)

여기에서 보듯이 이 당시는 때마침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교육방침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제3차 조선교육령(개정)이 막 시행되려 했고, 더구나 침략전쟁의 와중에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로 육군지원병제도가 강요되던 찰나였다. 특히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경우에 그 시행일자가 1938년 4월 3일에 맞춰져 있었는데, 이날은 곧 ‘초대 천황’인 신무천황의 제일(祭日)에 해당하며 그러기에 건국정신으로서 팔굉일우의 취지가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중일전쟁 1주년 기념일에 해당하는 1938년 7월 7일에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 朝鮮聯盟) 발회식(發會式)에서도 팔굉일우의 구호를 외친 흔적이 확인된다. 곧이어 7월 24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개최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전향자단체)의 결성식에서도 역시 팔굉일우의 기치를 내건 장면이 연출된 바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년 이후인 1940년에 맞이하게 되는 이른바 ‘황기(皇紀, 기원) 2600년’을 앞두고 팔굉일우란 말의 사용빈도는 다시 한 번 크게 높아지게 된다. 이에 관한 갖가지 봉축행사와 기념사업이 각처에서 추진되면서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팔굉일우를 상징하는 기념물들이 곳곳에서 속출하게 되었는데,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縣)에 건립된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 아메츠치노모토하시라; 天地基柱)’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기원 2600년’ 봉축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으며, 120척(尺; 36.4미터) 높이의 돌기둥 전면에는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親王, 천황의 동생)의 휘호로 ‘팔굉일우’의 큰 글씨가 새겨졌다. 이러한 거대 기념물의 바닥에는 1,789개의 절석(切石)으로 이뤄진 초석(礎石)이 깔렸는데, 이것들은 일본 전역의 각처와 일본군의 점령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남미(南美)와 독일(獨逸)에서 보내온 돌로 — 팔굉일우의 뜻을 상징하듯이 — 한데 엮어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각 지역마다 이곳에 사용될 기석(基石)의 헌납이 잇따랐으며, 예를 들어 『조선신문』 1939년 5월 17일자에 수록된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 충남(忠南)에서 화강석 기증(花崗石 寄贈)」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모집과정의 한 사례가 다음과 같이 채록되이 있다.

[대전(大田)] 기원 2600년 기념사업으로 야마자키현봉축회(宮崎縣奉祝會)에서는 금회(今回) ‘팔굉지기주’를 건설하기로 되어 동 사업의 찬동방(贊同方)을 총독부(總督府)에 신출(申出)함에 따라 총독부로부터 각도(各道)에의 통첩(通牒)에 근거하여 충남도(忠南道)에서도 좌(左)의 9단체(團體)에서 동 용재(同用材)로서 화강석(花崗石) 각(各) 1본완(本宛, 본씩)을 기증(寄贈)하는 것으로 되었다.
1. 충청남도(忠淸南道)
2. 동 교육회(同敎育會)
3. 국정총(國精總; 국민정신총동원) 충남연맹(忠南聯盟)
4. 조선사회사업협회(朝鮮社會事業協會)
5. 조선산림회 충남지부(朝鮮山林會 忠南支部)
6. 충남도농회(忠南道農會)
7. 충남도수산회(忠南道水産會)
8. 일적 조선본부(日赤 朝鮮本部;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충남지부(忠南支部)

한편, 저 멀리 목포근대역사관 2관(옛 동양척식 목포지점)의 진열공간에도 기원 2600년 봉축행사가 남겨놓은 기념물 하나가 남아 있다. 지난 2011년 11월 12일에 목포여자중학교 운동장의 토취공사를 하던 도중에 국기게양대 앞에서 노출된 사각기둥 형태의 ‘팔굉일우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비석의 앞쪽에는 조선총독이자 육군대장의 신분이던 미나미 지로가 쓴 글씨라는 표시가 또렷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목포여자중학교에는 이 비석의 대석(臺石, 받침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지금은 ‘진선미(眞善美;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라는 내용을 새긴 ‘교훈비(校訓碑)’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의 전면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목포공립(木浦公立; 나머지 부분은 ‘목포공립고등여학교’로 추정)”, “직원(職員)”, “생도(生徒)” 등 머리 부분 쪽의 글씨 일부만 판독이 가능하고 그 아래 매몰된 부위에 새겨진 내용은 직접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팔굉일우비(목포근대역사관 2관)의 비문 내용

이밖에 전라남도 해남의 마산초등학교 구내에 팔굉일우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지난 2017년에 확인된 바 있다. 이 비석의 후면에 ‘마산공립국민학교동창회(馬山公立國民學校同窓會)’라는 표시가 남아있는데, 일제가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일괄 변경한 때가 1941년 4월 1일이었으므로 이것은 그 이후 시기에 제작된 비석이라는 점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경기도 용인의 친일상징물전시관(용인중앙시장)에 배치되어 있는 ‘팔굉일우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사례의 하나이다. 이 비석은 양지공립보통학교(1911년 9월 1일 공립학교 개편)의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코자 1941년 9월에 동창회 후원회가 만들어 세운 것이며, 글씨는 친일귀족 송종헌(宋鐘憲, 1876~1949) 백작[창씨명은 노다 쇼켄(野田鐘憲)]이 썼다.

이밖에 실물자료의 잔존 여부는 미확인 상태이지만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옛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제14회 졸업기념사진첩(1944년 3월)인 『추상(追想) 2604』(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를 통해 이 학교의 구내에도 팔굉일우비(1941년 1월 1일 제막)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비석의 전면 양쪽에는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카시하라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 참가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는 표시가 남아 있다.

이와는 별도로 전주고등여학교(全州高等女學校)의 교정에도 역시 기원 2600년 기념사업으로 미나미 총독의 글씨를 새긴 ‘팔굉일우비’가 건립되어 1940년 12월 4일에 제막식이 거행된 사실이 신문기사로 확인된다. 또한 인천송림공립심상고등소학교(仁川松林公立尋常高等小學校)에서도 국민총력 조선연맹(國民總力 朝鮮聯盟)의 사무총장이자 20사단장 출신의 육군중장인 카와기시 분자부로(川岸文三郞)의 휘호를 받아 새긴 ‘팔굉일우비’가 1940년 12월 21일에 제막되었다는 보도내용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열거한 사례들이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 — 파쇄되었다거나 혹은 매몰되었다거나 하는 —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목포여자중학교나 양지초등학교의 매몰 처리된 팔굉일우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학교에서도 어느 날 홀연히 폐기된 비석의 잔편들이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팔굉일우’의 뜻풀이와 관련하여 이것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적당한 ‘영어표현’이 없다고 하여 한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0년 2월 16일자에 수록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자의(字義), 적당(適當)히 영역불능(英譯不能)」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등장한다.

[도쿄전화(東京電話)] 기원 이천육백년(紀元 二千六百年)과 함께 급(急)짝스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팔굉일우(八紘一宇)란 말은 아 건국정신(我 建國精神)을 표시(表示)하는 자(者)로서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使用)되지만 해석(解釋)이 구구(區區)하여 의회(議會)에서도 누누(屢屢)히 문제(問題)가 되었고 13일 예산총회(豫算總會)에서는 마츠우라 문상(松浦文相)이, 또 14일에는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郞) 씨의 질문(質問)에 답(答)하여 요나이 수상(米內首相)이 “굉대무변(宏大無邊)의 어신덕(御神德)을 편(遍)히 천하(天下)에 홍포(弘布)하려는 대어심(大御心)이라”고 명확(明確)히 하여 자(玆)에 자의(字義)의 고정해석(固定解釋)이 나왔는데 여하간(如何間) 의장(議場)에서 이 문제(問題)가 나온 것은 철도성 관광국(鐵道省 觀光局) ‘팜푸렛트’에 ‘싸 — 유니바스 원 파미리이 프린시풀(The Universe One Family Principle)’이라고 영역(英譯)된 데서 발단(發端)된 것이다.
금후(今後) 이 문구(文句)를 외국역(外國譯)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 터인가? 관광국(觀光局)에서는 카타오카 국장(片岡局長)이 “그런 번역(飜譯)은 사실(事實)로 적당(適當)치 않을는지 모르나 팔굉일우(八紘一宇)란 말에 그대로 적당(適當)한 영어(英語)가 없으므로 우선(于先) 그렇게 역(譯)한 것이니 역어(譯語)는 그대로 사용(使用)할 경우에 오해(誤解) 없도록 주석(註釋)을 부(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동대 명예교수(東大 名譽敎授) 이치카와 산키(市河三喜) 박사(博士)도 팔굉일우(八紘一宇)란 말을 간단(簡單)히 표현(表現)할 역어(譯語)는 발견(發見)되지 않는다고 영어학계(英語學界)의 태두(泰斗)도 수긍(首肯)하는 터인데 여하간(如何間) 심원(深遠)한 우리네 이상(理想)을 외국인(外國人)에게 알리기는 번역(飜譯)으로는 좀처럼 어려운 문제(問題)이다.

여기에 나오는 “굉대무변의 어신덕을 편히 천하에 홍포하려는 대어심이라 …… 운운”하는 구절은 결국 “세상 전부를 천황의 치세에 들게 만든다”는 소리로 들릴 따름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제가 침략전쟁 시기에 그토록 강조했던 ‘팔굉일우’의 정신에 입각한 세계평화확립이라는 말은 — “위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 우리는 하나)”라거나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 그야말로 그들이 전쟁에 승리하여 모두가 일본천황의 지배 하에 들어있는 그러한 세상을 가리킨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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