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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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2
– 수운 최제우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입각한 인간상 –

이정아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이번 〈민족사랑〉에 싣는 글은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 160호에 실었던 졸고 「방정환의 새로운 어린이」와 〈방정환 연구〉 5호에 실었던 「천도교 개벽사상을 기반으로 한 방정환 어린이교육운동의 현재적 함의」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방정환이 생각한 교육의 목적을 ‘어린이 주체성 확립’으로

보고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1.9.~1931.7.23.)에 관한 두 번째 교육적 단상을 논의하고자 한다. 방정환은 이전의 전통적 아동교육관과 대비하여 새로운 아동교육관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통적 아동교육의 목적이 ‘성인의 도’에 이르게 하는 바를 비판하였다. 이에 교육의 목적을 아동이 주체가 되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린이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어린이’가 되는 데에 두었다.

이러한 아동중심교육의 바탕은 천원 오천석(天園 吳天錫 : 1901.11.12.~1987.10.31.)을 아동중심교육의 시초로 보는 경향성과는 다른 시각이다. 오천석은 존 듀이(John Dewey: 1859. 10.20.~1952.6.1.)로 대표되는 서구 아동중심 교육사상의 뿌리를 두고 해방 후 ‘새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인물이다. 하지만 오천석 이전에 방정환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교육관을 제시하였다.

전통적 아동교육관을 볼 때, ‘동몽(童蒙)’은 무지몽매한 불완전한 존재이었으며 이러한 동몽교육은 습관의 형성과 기질의 변화를 일차적인 관심사로 삼는 수신에 목적이 있었다. 특히 ‘소학(小學)’의 교육목적은 ‘대학(大學)’에서의 지식의 습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심성적 함양 및 태도를 형성하고자 배우는 것이었다. 동몽교육의 성격은‘성인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교육’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문에서 아동(兒童)의 아(兒)는 절구 구(臼)자와 사람 인(人)자가 합쳐진 글자로, “머리의 모습이 절구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을 지닌다. 동(童)은 마을 리(里)자와 설립(立)자가 합쳐진 글자로, “마을에서 서서 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편‘동몽’은 본래 관례를 치르지 않은 15세 이전의 미성년 아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몽의 시기는 현대적 연령 구분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동몽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대략적으로 5세에서 15세에 이르는 아동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동몽교육은 인간됨의 바탕을 함양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주형되어 있지 않는 동몽기부터 교육이 실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때, ‘동몽(童蒙)’은 ‘어리다’(童)와 ‘어리석다’(蒙)는 의미를 가진 두 한자의 조합어이다. 특히 ‘어리석다’의 뜻을 지닌 ‘몽’(蒙)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자각이 어둡거나 불분명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동몽(童蒙)’은 동자(童子), 동유(童幼), 동치(童稚) 등의 용어와 함께 쓰인다. 달리 말하면, 근대 이전의 아동은 독자적이거나 특수한 존재로 인식되진 않았다.

아동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고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한 이로 방정환을 들 수 있다. 어른의 기준이 아니라 아동의 입장 즉, ‘어린이만을 위하여 판단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어른들의 체벌이나 꾸지람보다는 어린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반항심이 없어지고, 두 번 세 번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이해시키지 못하는 꾸지람은 당장의 효과만 줄 뿐이다. 이렇듯 소파는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하기 위해 아동중심교육을 강조하였다.

한 가지는 지금의 이 사회, 이 제도밖에는 절대로 다른 것이 없다 하여 그 사회 그 제도 밑으로 끌어넣으려는 것과, 한 가지는 지금의 이 사회 이 제도는 불합리 불공평한 제도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하여 주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은 필연으로 강제와 위압적 교육이 생기는 것이요, 뒤는 필연으로 애정 어린 지도가 생기는 것입니다.(『천도교회월보』 제150호. 1923.3)

그러면, 어른이 어린이들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어린이들을 완전한 인격으로 대우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주지하듯이, “강제와 위압적 교육” 아니라 “애정 어린 지도”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계몽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어른의 구속이나 억압, 부담 등에서 벗어나 스스로 설 수 있는 계몽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계몽의 주체가 된다면, 독립된 인격체가 되며, 더 이상 ‘작은 어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지식으로 지금 사회를 꾸미고 현재 도덕을 만들어 가지고 살지만은 그것은 우리가 사색하는 범위와 우리가 가진 지식 정도 이내의 것이지요. 그 범위 밖을 내어다볼 수 있다면 거기는 그보다 다른 방침과 도덕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것이 있을는지도 모를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우리 지식으로 이렇게 꾸미고 이렇게 살고 있지만 새로운 세상에 새로 출생하는 새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사색하는 바가 있고 자기들끼리 새로운 지식으로 어떠한 새 사회를 만들고 새 살림을 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덮어놓고 헌 사람들이 헌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헌 사회 일반을 억지로 덮어씌우려는 것은 도저히 잘하는 일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위의 글)

위의 글에서 방정환이 보기에 조선의 학교는 아동을 어른들의 세계에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의 연장이었으며, 어른 중심의 논리와 규율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어른 중심의 논리와 규율은 일제가 주도적으로 주입하려는 일제의 식민 논리와 규율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에 새로 출생하는 새 사람들”은 바로 미래 조선을 이끌어갈 지금 시대의 새 세대 즉, 어린이라고 볼 수 있다. “새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사색하는 바가 있고 자기들끼리 새로운 지식으로 어떠한 새 사회를 만들고 새 살림을 하는 일”은 어린이가 계몽의 주체로서 성장하여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가야함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꽃과 같이 곱고 비둘기와 같이 착하고 어여쁜 그네 소년들을 우리는 어떻게 지도해 가랴. 세상에 이보다 어려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가정의 부모와 같이 할까. 그것은 무지한 위압입니다. 지금 학교 교사와 같이 할까. 그것도 잘못된, 그릇된 인형 제조입니다. 지금 그네 부모들 대개는 무지한 사랑을 가졌을 뿐이며, 친권만 휘두르는 권위일 뿐입니다. 화초 기르듯 물건 취급하듯 자기 의사에 꼭 맞는 인물을 만들려는 욕심밖에 있지 아니합니다..(위의 글)

방정환에게 어린이는 ‘부모의 물건’이나 ‘기성 사회의 물품’이 아니다. 그는 ‘장유유서와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전통적 아동교육론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아동교육관을 제시한다. 또한 더 이상 ‘어린이’는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가는 과정의 연속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대로 독특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이정아, 위의 글) 단일한 주체로서의 존재를 천명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그는 ‘지금의 사회에서 부모들은 친권만을 휘두르고 화초를 키우듯이 또는 인형을 제조하는 사태’를 통감하고 있다. ‘어린 사람 자신을 위하여’를 붙여 부모들의 표준에서 벗어나 어린이의 행동은 어린이 자신이 행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어린이’는 독자적이고 특수한 존재인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미성숙한 존재가 아닌 하나의 완전한 존재 자체가 된다. 이로써 소파 방정환은 아동중심사상에서 더 나아가 아동존중사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미래를 상징하는 어린이의 주체성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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