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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어 몰랐던 이완용… 옆에서 ‘매국’ 도와준 유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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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인직

윤석열 정권은 북한의 위협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한일 군사협력을 정당화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김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영향력 팽창으로 향후 한국의 주권이 더욱 침해되면, 북한의 위협이 본질이었는지 일본의 팽창이 본질이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북한의 위협이 부각되므로 일본과 연대한다’가 아니라, 실은 ‘일본과 연대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부각시킨다’가 진실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구한말의 친일파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 일본과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실현된 것은 러시아의 한국 강점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 강점이었다. 그 시대 위기의 본질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 있었다. 그런데도 친일파들은 러시아의 위협이 본질인 양 선전했다. 본말을 전도시켜 대중을 기만했던 것이다.

이완용의 최측근이었던 이인직

▲ 이인직 ⓒ 자료사진

<혈의 누>의 저자인 이인직도 본말전도의 방식으로 대중을 교란했다. 1908년에 발표한 사회고발 소설인 <은세계>에도 그런 방식이 내재돼 있다. 이 작품에는 조선왕조 지방 정권의 탄압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최병도의 딸과 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최옥순·최옥남 남매는 1907년에 고종황제가 일본과 친일파들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된 사건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옥순은 “옥남아, 세계 각국에 개혁 같은 큰일이 없고 개혁 같이 어려운 일은 없는 것이라”라고 한 뒤 “지금 이렇게 큰 개혁이 되었으니, 네 생각에 앞일이 어찌 될 듯하냐?”고 묻는다. 이 대목에서 이인직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고종의 강제 퇴위를 ‘큰 개혁’으로 지칭했다.

옥남은 “지금이라도 개혁만 잘되면 몇십 년 후에 회복될 도리가 있지요”라고 기대감을 표한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의 개혁이 너무 늦어졌다고 탄식한다.

“만약 삼십 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 년 동안에 또한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西)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幾年)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

30년 전에라도 개혁이 됐다면 일본과의 동맹으로 북쪽 러시아의 팽창을 막아 불과 몇 년 내에 1등 강국이 됐을 수도 있을 거라며, 일본에 의한 고종 폐위를 서글퍼하기보다는 왜 이제야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듯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1907년으로부터 30년 전이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1873년)한 1870년대 후반이다. 일본에 시장을 개방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도 이 시기에 체결됐다.

대원군은 청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일본과 미국·프랑스를 경계했다. 1870년대는 쇄국정책으로 불리는 그 노선이 폐기되고, 고종 정권이 일본과 미국에 우호적이 되어 가는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개혁을 제대로 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를 견제했다면 1907년 지금쯤은 대한제국이 1등 강국이 되었을 거라고 이인직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주장했다.

대한제국은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조종을 받는 나라가 됐다. 이 시기 대한제국이 직면한 최대 위협은 일본의 위협이었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실질적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인직은 1908년에 발표한 소설을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일본과의 연대를 정당화했다. 일본의 위협이 ‘본’이고 러시아의 위협은 ‘말’이었는데도, 본말을 뒤집어 러시아가 훨씬 위험한 듯한 이미지를 조성해 일본과의 연대를 합리화했다.

경기도 이천 출신인 이인직은 고종 전임자인 철종이 있을 때인 1862년 7월 27일 출생했다. 어릴 때 한학을 배운 그는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해 친러파가 득세하고 친일파가 위축된 1896년에 친일파 조중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도쿄정치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간 그는 28세 때인 1900년에 관비 유학생 자격을 획득해 정식 학생이 됐다. 1903년에 귀국하게 되는 그는 그곳에서 중요한 인연을 맺는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인직 편은 “재학 시절 고마츠 미도리에게서 배웠다”고 말한다. 2019년에 <한민족어문학> 제83집에 수록된 표세만 군산대 교수의 논문 ‘이인직 문학의 주변’은 훗날 이토 히로부미 밑에서 한국통감부 외교부장이 될 고마쓰 미도리(1865~1942)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인직을 직접 가르쳤다는 고마쓰 미도리는 게이오대학 출신으로 1887년부터 1895년까지 예일대학에서 법학사,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다음해에 귀국하여 무쓰의 도움으로 외무성 번역관이 된다.”

1896년 5월까지 외무대신을 역임한 무쓰 무네미쓰의 지원으로 외무성에 들어간 고마쓰는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1910년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고마쓰는 사후 24년 뒤인 1976년에 출간된 <메이지 외교 비화(明治外交祕話)>에서 자신이 한국 병합을 자신만만하게 추진했노라고 회고했다. 그 자신감의 배경은 바로 이인직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3권에 인용된 <메이지 외교 비화>는 “내가 병합 문제를 담판 짓는 기회를 붙잡을 자신이 있다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에게 말했던 것은 터무니없는 한때의 농담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강점 뒤에 초대 조선총독이 될 데라우치 한국통감에게 그렇게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은 당시 한국 조정의 중심 세력이었던 수상 이완용과 농상 조중응을 직접 설득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중응과는 직접 말할 수 있었지만, 이완용은 일본말을 몰라서 그의 심복인 이인직을 통해 복안을 말할 작정이었다.”

고종이 폐위된 1907년 7월에 이인직은 내각 기관지를 발행하는 대한신문사의 사장이 됐다. 이완용의 지원하에 사장이 된 이인직은 그 뒤 이완용의 최측근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이 이인직에게 의존했으므로 자기 제자인 이인직을 움직이면 이완용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고마쓰의 계산이었다.

상황은 고마쓰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인직과 고마츠의 교섭을 토대로 1910년 8월 16일부터 데라우치와 이완용 사이에 합병조약 체결 교섭이 시작되었고, 8월 22일 정식으로 조인되었다”고 기술한다. 대한제국을 염가에 판매한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이가 <혈의 누>의 저자였던 것이다.

▲ 이인직이 쓴 <혈의 누> ⓒ 위키미디어 공용

국어책보다는 한국사책에서 더 많이 언급돼야

오늘날 이인직은 신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만 알려지기에는 친일 행적이 엄청나다.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긴 경술국치를 실무적으로 움직인 그가 소설가로만 알려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는 국어책보다는 한국사책에서 더 많이 거론돼야 할 인물이다.

이인직은 나라를 넘긴 뒤에는 ‘일제 국정홍보처장’ 역할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1911년에 그가 총독부 직속인 경학원의 사성(司成)이 되고 1913년에 <경학원잡지>의 편찬주임이 된 일을 언급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홍보, 지지하는 <경학원잡지>를 편찬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지방 순회강연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적극적으로 찬양, 홍보”했다고 설명한다.

이인직은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한일동맹을 합리화하는 소설을 쓰고 일제의 국권침탈을 실무적으로 보조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일본은 1908년에 공로갑(功勞甲)이라며 하사금을 내리고 1911년부터 연봉 900원을 지급했다.

1911년에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연봉은 침식 제공 없이 98원에서 192원 사이였다. 이에 비하면, 친일 공로가 갑(甲)이라는 이인직은 친일로 먹고사는 수준을 넘어 친일재산도 축적할 수 있었다. <은세계> 같은 작품들도 친일을 위한 것이니 이런 집필 활동으로 인한 수익까지 감안하면 친일재산은 더욱 많아진다.

이인직은 그렇게 친일재산을 축적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일왕에게 성심을 다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1916년에 히로히토의 왕세자(황태자)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쓴 일을 소개하면서 “이인직은 천황의 통치를 태평성대에 비유하고 모두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고 송축했다”라고 기술한다. 한국인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던 3·1운동 3년 전에 ‘한국인들은 성인군자의 백성이 되어 즐겁다’는 글을 남겼던 것이다. 그달 25일, 이인직은 54세로 사망했다.

김종성 기자

<2024-03-3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어 몰랐던 이완용… 옆에서 ‘매국’ 도와준 유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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