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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빈모금] 일제가 ‘제일 맹렬히 잡고자’ 했던 김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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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승하를 계기로 ‘제2의 만세운동’ 계획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했습니다. 조선 500년 마지막 왕의 죽음을 맞아 애도 분위기가 확산됨은 물론 정의부·신민부 등 만주 독립군 부대가 국내로 진입할 것이라는 기사가 잇따르는 등 항일 분위기 역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은 순종의 장례에 맞춰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기획합니다. 3.1운동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상징되는 천도교, 기독교 세력이 앞장섰다면 이번에는 조선공산당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전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1개 사단의 군대와 4천 명의 경찰을 동원하며 삼엄한 경계를 펼쳤습니다. 순종 승하 후 1주일 동안 경찰에 검속, 설유, 주의 등의 제재 조치를 받은 사람이 종로경찰서 관내에서만 29,497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조선공산당, ‘민족운동의 선봉’에 나서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공산당은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취지 아래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당일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연도를 따라 요소요소에 시위대를 배치해두고, 선전 삐라를 살포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것은 물론 만세운동 이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해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대한독립당을 조직한다는 복안이었습니다. 비록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당초 계획한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6.10만세운동 직후 도산 안창호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 보고회’에서 6.10만세운동을 계승하여 “전민중의 중심이 될 통일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6.10만세운동에서 드러난 민족통일전선의 이념과 노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 6.10만세운동
이처럼 1926년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입니다. 하지만 3.1운동은 말할 필요도 없고 광주학생운동도 광주광역시와 전남 나주 두 지역에 기념관이 있고 그날을 기념하여 11월 3일은 국가기념일인 ‘학생의 날’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6.10만세운동은 2020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점만 보더라도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에 비해 관심이 낮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을 배제하거나 축소하려는 경향 즉, 뿌리 깊은 반공의식이 독립운동사에도 그대로 투영된 결과입니다. 지난해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논란이 그 사례입니다.

김단야,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배재고보를 다니던 김단야(1900~1938)는 1919년 3.1운동 발발 이전부터 시위가 일어난 뒤에도 비밀결사 일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고향인 경북 김천으로 내려와 또다시 만세시위를 주도해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습니다. 김단야는 3.1운동 이후 상하이 망명을 시작으로 1922년 극동민족대회 참석,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6.10만세운동 계획,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동양부 근무, 1929년 잡지 ‘콤무니스트’ 발간, 1934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한때 김단야는 일제 경찰이 ‘제일 맹렬히 잡고자’했던 독립운동가요 혁명가였습니다.
독립운동연구의 진전과 냉전의식의 완화로 참여정부는 2005년 ‘조선공산당 창당과 재건을 주도하며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확산을 통한 독립을 위해 소련,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활동’한 공훈을 기려 김단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냉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야
김단야에 대한 선양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평생을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로 살았으나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 혐의로 숙청된 김단야. 고향에서도 김단야의 이름은 없습니다. 3.1운동이 벌어진 지역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은 기념물조차 김단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천교육너머’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김단야 관련 세미나와 김단야 생가 그리고 김단야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던 유동산을 답사했습니다.
한번도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는 김단야의 손녀들은 김단야의 생가(김천시 개령면 동부리)터와 유동산 인근에 작은 표석 건립을 소원합니다. 외세와 친일분단세력이 만들어 놓은 시대착오적인 냉전의 굴레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뜻 있는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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