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단야와 그의 시대’를 호명하는 사람들 – 구자숙 김천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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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단야와 그의 시대’를 호명하는 사람들
– 구자숙 김천 후원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독립운동 열전』(전 2권)으로 2022년 제16회 임종국상(학술부문)을 수상한 임경석 교수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 책은 기존의 익숙한 관념에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별개인 양 다뤄져 온 관행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사회주의 역사는 독립운동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놓여 있음을 얘기했습니다. 단지 그 일부일 뿐 아니라 주류의 위치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사회주의 열전’이 아니라 ‘독립운동 열전’이라고 지었습니다. 헤아려 보았습니다. 제 책은 72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70%가 사회주의 관련자이더군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사 전개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점하는 비중이 딱 그 정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교롭습니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부·공공기관에서 간행하는 독립운동사 서술을 둘러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회주의는 배제되거나 축소되어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도 그렇습니다. 서훈 대상자가 사회주의에 관련되었음이 드러나면 제척되거나 등급이 깎입니다.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역사 서술과 독립유공자 심의는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제 책은 관찬 독립운동사가 아니라, 민중 버전의, 민찬 독립운동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임경석 교수의 수상 소감은 온전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을 대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사실 독립운동 앞에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부터가 이미 선입견이다. 소설가나 작가 앞에 ‘여류’를 붙여 남성과 구별 짓던 오래된 버릇처럼 말이다.

이번 달에 만난 사람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표 인물 중 한 명이면서도 제대로 호명되지 못하고 있는 김단야(1901~1938, 본명 김태연. 2005년 독립장 추서)를 고향 김천에서 꾸준히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구자숙 회원이다.

구자숙 회원은 전교조 경북지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전직 교사이다. “1980년대 이오덕, 성내운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길을 찾아 헤맸다”고 대학시절을 회상한다. 교사가 된 이후 “내가 원하는 세상을 오늘 내 교실에서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글쓰기와 연극 활동을 중점에 두고 지도했다.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외쳤던 수많은 전교조 선생님처럼 구자숙 회원도 교직 생활 내내 제자들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노동이 대접받고 통일된 새 세상을 꿈꿨건만 갈수록 심해지는 입시 경쟁과 점점 타성에 젖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학교를 떠났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본성은 숨길 수 없는 법. 책 읽고 글쓰고 여행도 하는 여유를 즐기던 것도 잠시. 구자숙 회원을 다시 세상 한가운데 불러낸 것은 사드 배치 소식이었다.

“제가 사는 김천에서 가까운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사드가 배치된다는 발표에 김천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매일 집회가 열렸고 저도 머릿수라도 보 탠다는 마음으로 저녁마다 습관적으로 집회에 참여했어요. 그런데 점점 사드를 둘러싼 미국과 우리의 관계, 세계정세를 배우면서 ‘아, 난 도대체 뭘 알고 가르쳤지?’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줄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리에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집회도 많이 줄고 사드 배치 후 포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여전히 여기에서 우리가 자주독립국임을 외치고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존재의 시작은 부르고 외치고 선언하는 것. 이처럼 미국의 패권에 맞선 외침들이 100년 전 김단야를 다시 호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매일 사드 반대 집회를 했나 싶네요. 그렇게 집회하면서 참여자들 사이에 끈끈한 동지애도 생기고 지방자치선거도 겪으면서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김천교육너머’라는 시민단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김천교육너머 김영록 사무국장이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 김단야에 대해서 아느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된 적이 있었다’면서 ‘김단야에 대해서 공부 좀 해서 발표해요.’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단야 모임을 만들어서 공부하다가 이를 정리해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단야 세미나를 연 것이 계기입니다.”

사실 김단야는 국가보훈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적은 없다. 아마도 2021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권오설과 6·10만세운동을 같이 기획했기에 김단야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여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단야의 공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김단야를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박정희 우상화의 한복판 구미 옆 김천이 아니던가.

“더 공부하려니 모든 사람들이 김단야는 후손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해방 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김단야의 생가터를 찾아가보자고 나섰어요. 아무도 없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소재 개령교회(김단야의 할아버지인 김지옥이 세웠다고 전해진다)에 갔다가 들판에서 일하는 분에게 몇 마디 말씀을 여쭤보니 김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 김타관(1902~1975) 선생의 아드님이셨어요.

그분은 우리 일행에게 김단야의 아들 이야기며 김단야 생가터도 알려주 었습니다. 또한 현재 김단야 생가터에 살고 계신 분은 우리 일행에게 ‘현숙이 누나’를 알려주었습니다. ‘현숙이 누나’는 바로 김단야의 손녀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2019년 김단야 선생 세미나에서 김단야 선생의 손녀 세 분과 가족들, 개령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가족들과도 관계를 계속 이어 오고 있습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이라는 명분 속에 시작한 김단야 선양 사업이 현재는 다소 난관이다.김천시와 교육청에 수차례 김천의 독립운동과 김단야를 김천 학생들에게 교육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기 일쑤여서 서운하고 답답하다. 어찌하여 자기 동네 독립운동가도 가르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현재 대통령과 그 장관들 특히 경북 칠곡 다부동에 백선엽, 이승만 동상 건립에 앞장선 국가보훈부 장관을 상기하면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갈 길을 멈출 수는 없다.

“저희들은 평범한 시민들이고 전문가가 아니어서 자료를 찾아 공부하는 게 힘듭니다. 그리고 또 앞장서서 뭘 진행하는 것도 어렵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생각합니다. 일단 김단야 선생의 현충원 봉안을 계기로 학술제를 열어 우선 김단야에 대해 알리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생가터와 개령 사람들이 김단야와 함께 만세를 불렀던 유동산 입구에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합니다.”

구자숙 회원과 뜻있는 김천 분들의 소망에 화답하고자 연초부터 6·10만세운동유족회(회장 황선건)를 중심으로 우리 연구소와 관련 역사학자들이 모여 논의한 결과 올해 6월 10일 서울에서 가칭 ‘김단야와 그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학술회의를 열기로 했다. 또한 연구소는 김단야 생가터 표지석 모금도 진행할 예정이다.

한평생 독립과 항일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일제의 스파이 혐의로 소련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김단야와 그의 시대’ 사람들을 호명하는 일이 김천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가급적 빨리 나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소련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주 긴장된 사업이 있는 그런 때에 나는 꼬박 7개월째 일이 없는 상태에 있다. … 내 문제가 신속히 처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결국 사람은 실천을 통해 검증되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내게도 주어지길 요청한다. 김단야 1937년 3월 16일 ―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 자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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