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4) : 「애국가」 등 7곡의 항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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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노래 함께 보기 4]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4) : 「애국가」 등 7곡의 항일노래

이명숙 책임연구원

신흥무관학교의 교과목 중에는 창가과목이 있었다. 수업 교재로 ‘창가집’이 있었을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노래 가사의 일부만을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의 회고록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신흥무관학교에서 창작한 노래로 소개한 「신흥학우단가」[신흥무관학교의 노래(2)]와 「실낙원가」[신흥무관학교의 노래(3)]가 실려 있던 원병상(元秉常)과 허은(許銀)의 회고록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이 노래 외에도 신흥무관학교와 관계자들 사이에서 당대에 공유되던 노래들의 가사 일부가 기록돼 있는데, 그 가사를 『항일음악330곡집』(노동은, 2017)에서 찾아 곡명 등을 확인해 정리한 것이 다음의 표다.

이 노래들은 신흥무관학교 창립 이전인 1900년대와 신흥무관학교가 운영되던 1910년대에 만들어져 불린 항일노래이다. 신흥무관학교와 그 관계자들이 다른 어떤 노래보다 많이 불렀을 것으로 보이는 이 노래들은 당대 국외 동포들 사이에서도 많이 전파되어 불렸다. 중국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局子街) 광성중학교에서 1914년 음악교재로 발간한 『최신창가집(最新唱歌集)』을 비롯해 1920년대 『가곡선집(歌曲選集)』, 1930∼1940년대 『망향성(望鄕聲)』, 1943년 발간 『광복군가집』 등 항일노래와 독립군가로서 각종 노래책과 가사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만큼 이 노래들은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동포들 사이에서 시대를 관통하며 널리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노래가 오래도록 전승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주 반복해 불렀기 때문이리라. 항일독립을 염원하는 동포들이 내용적·정서적으로 공감해 유행한 노래가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독립의지를 다지는 매개로써 공유되며 불렸던 것이다.

이렇듯 공유·전승되는 노래들은 어떤 특징을 가졌을까. 신흥무관학교에서 부른 위 노래들을 그 연원과 시대별 가사 변화, 노래의 활용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부분을 이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애국가류

「정신가」의 1절 전체 가사를 기억하는 허은은 왕산(旺山) 허위(許蔿) 일가의 망명과 함께 서간도로 이주했다. 허은의 큰오빠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제일 처음 배운 노래가 「정신가」였고, 허은은 큰오빠를 통해 배웠다. 곡명이 「감동가(感動歌)」이기도 했던 「정신가」 1절은 “슬프도다, 우리민족아! / 오늘날 이지경이 웬일인가? / 사천여년 역사국으로 /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 오늘날 이지경이 웬말인가? / 철사주사(鐵絲紬絲)로 결박한 줄을 /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 독립만세 우레소리에 / 바다가 끓고 산이 동(動)하겠네”인데, 국권상실의 비참한 상황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면서도 스스로 나서 일제 억압을 끊어버리고 독립을 쟁취하자고 노래한다. 1900년대부터 무궁화가나 애국가만큼 우리 민족에 많이 불렸기 때문에 1910년대 만들어진 각종 창가집에 두루 수록되어 있다. 1910년 10월 12일자 『신한민보』에는 이 노래를 「애국가」로 소개하며 ‘동포들이 수시로 읽고 노래하여 후일을 준비’하자고도 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애국가」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원병상도, 허은도 모두 1절만 기록했는데, 당시 각종 애국가의 곡조로 쓰였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붙여 불렀다. 이 「애국가」와 가사가 가장 유사한 애국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신흥무관학교의 「애국가」에서는 ‘제국’, ‘대한’ 등의 단어가 사라진 것이 확인되는데, 강제병합과 함께 ‘대한제국’이 사라진 상황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후렴의 ‘무궁화 삼천리∼길이 보전하세’는 고 노동은 선생이 ‘각종 애국가·무궁화가류에 공통으로 쓰여 있어 한국인 공동 작사’라고 표현했듯이 신흥무관학교의 「애국가」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품질좋은 단군자손’이란 표현으로 인해 『보중친목회보』에 실린 ‘애국가’와의 유사성이 더 높은데, 여기에는 신흥무관학교 학감·교장을 역임한 윤기섭(尹琦燮)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윤기섭은 보성중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보중친목회 회장이자 ????보중친목회보???? 편집원이었고, 제1호 회보 발행이 준비되던 1910년 4월에 제1회로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2월경에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다음해인 1911년 8월 일제에 대한 장기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 같은 윤기섭의 행적을 통해 신흥무관학교 「애국가」의 연원이 보성중학교의 「애국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신흥무관학교 조례에서 교직원·생도 전원이 함께 부른 신흥무관학교 「애국가」는 신흥무관학교가 10여 년 동안 배출한 3,500여 명 생도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전해졌다. 임시정부 이동 시기의 항일노래와 당시 재중 한인들의 애창가 158곡이 담긴 『망향성(望鄕聲)』에도 「무궁화 내 배달」로 기록돼 있다. 『망향성』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와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이국영(李國英)이 필사해 기록으로 남긴 가사집이다.

독립군가류

‘무쇠골격 돌근육’으로 시작하는 「소년남자가」는 허은의 회고록에서 곡명 없이 ‘군가’ 또는 ‘신흥무관학교를 다니던 아재들이 부르던 노래’라며 가사 일부만이 기록돼 있다.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신체를 발육하는 동시에 / 경쟁심 주의를 양성하려고 / 공기좋고 구역넓은 운동장으로 / 활활 나는 듯이 빨리 나가세 / 만인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세우세”라는 부분이 「소년남자가」 가사와 거의 같다. 『최신창가집』에 「야구」란 곡명으로 실린 「소년남자가」의 가사는 이보다 앞선 1909년 7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확인된다.

안창호가 작사한 것으로 1909년 7월 22일 유학생들로 조직된 야구단의 야구경기 중 운동가로써 ‘소년남자’를 불렀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당시 방학을 맞아 귀국한 유학생들이 유학 중 배운 바를 보급하고자 강습소를 개설 운영하면서 한편으로 야구경기를 진행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체력 단련과 애국정신을 강조하고 있어 독립을 위한 전투를 준비하는 듯한 내용이다. 이런 가사의 특성 때문에 『최신창가집』, 『가곡선집』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1940년경에는 독립군가인 「광복군가2」로도 전용되었다. ‘소년의 활동시대’가 ‘혈전의 분투시대’로, ‘만인대적 연습하여 후일전공 세우세’가 ‘철천대적 격파하러 독립전쟁 나가세’로 바뀌어 전투가 눈앞인 듯한 광복군의 군가가 되었다.

「조국생각」은 『최신창가집』에 총 8절의 노래로 수록돼 있다. 북간도에서부터 불리기 시작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와 블라디보스토크·미주지역의 우리 동포들에게까지 알려져 널리 불렸다. 허은은 전체 5절 가사를 남겼는데, 『최신창가집』의 가사와 비교해봤을 때 몇몇 단어의 변용이 확인되는데, 다음 표의 밑줄 친 부분이 흥미롭다.

1절 ‘자손에 거름될 이내 독립군’이란 가사와 군가풍 곡조로 이 노래가 독립군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절 가사에서는 노래가 불린 시기를 짐작할 만한 ‘사년’과 ‘9년’이란 국권상실 기간을 표시한 단어들이 확인되어 각 노래가 불린 시기가 1914년과 1919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3절에서 ‘한반도’가 ‘동반도’로, 5절에서 ‘두만 건너’가 ‘압록강 건너’로 변한 것을 통해 신흥무관학교가 위치한 서간도의 지리적 특징을 반영해 가사를 바꿔 불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원병상이 남긴 「독립군 용진가」는 1917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국외 항일운동 관련 일제 측 각종 문서에서 「독립군가」란 이름으로 꾸준히 확인된다.

1943년 발간된 『광복군가집』에도 9번곡 「용진가」로 수록돼 있어, 신흥무관학교에서부터 한국 광복군까지 30년 가까이 대표적 독립군가로 불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병상은 1절 가사와 후렴만 남겼는데, “요동만주 넓은뜰을 쳐서파하고 /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쳐보세 / (후렴) 나가세 전쟁장으로 / 나가자 전쟁장으로 /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분발해 /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이다.

기념일 노래

국외 동포들이 강제병합 이후 빼놓지 않고 예식을 치르는 기념일 중 하나는 국치일이다. 허은이 기억하는 「국치추념가」 역시 ‘서간도의 8월 29일 밤 학교 운동장’에 모여 진행된 예식에서 목이 터져라 부른 노래였다.

가사는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 조국의 운명이 다한날이니 / 가슴을 치고 통곡하여라 / 자유의 새 운(運)이 온다”이다. 1920년대 상해 대동민보사(大東民報社)에서 만주지역에서 불린 노래들을 모아 중국 동북 각 지방에 배부한 『가곡선집』에는 전체 4절 가사가 확인되는 데, 1절에서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 산천도 오희러 슬품을 띄고 / 일월도 □하여 빛을 힐토다”라고 변화됐고, 이어지는 2∼4절 가사에서 슬픔과 설움이 더욱 극대화되어 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즈음에 지복영(池復榮)이 부른 ‘국치의 노래’에서는 4절 가사가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니 / 아픔과 슬픔을 항상 머금고 / 복수의 총칼을 굳게 잡고서 / 지옥의 쇠문을 깨뜰지어다”라고 되어 있어 독립전쟁을 위한 결연한 의지를 강고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변화되어있다. 지청천(池靑天)의 딸인 지복영은 신흥무관학교 폐교 후 신흥관계자들이 세운 학교에서 수학했고, 임시정부 이동 시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및 한국광복군 창설 후 광복군 등으로 활동했다.

허은의 마음속에 생생히 남아있던 「도강가」의 노래 구절은 “사천이백 오십이년 삼월일일은 / 이 내몸이 압록강을 건넌날이니 / 연년이 이날은 돌아오건만 / 나의목적 달하기전 못돌아오리”이다.

1919년의 3·1운동 즉 전국적 만세시위 이후 새로운 항일투쟁을 위해 압록강을 건넌 이들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 조국을 떠난 수많은 이들뿐만 아니라, 강제병합 전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모여들었던 신흥 관계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을 것이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불렀기 때문에 노래 또한 다양한 변화를 보여 제목과 가사뿐 아니라 곡조도 여럿이 전하고 있다. 허은의 가사처럼 “사천이백오십이년”으로 시작하는 『가곡선집』의 ‘도강가’는 원래의 한 절을 두 절로 나눈 형태여서 총 6절로 되어있다.

이상 신흥무관학교에서 공유하고 전승한 7곡의 노래들을 가사 내용과 활용 등의 측면을 고려해 살펴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신가」와 「애국가」는 애국가류다. 당시 국외 동포들은 각종 모임, 회의, 행사 등을 진행할 때 항상 참가자 전원이 애국가를 부르며 시작했다. 단순한 의식이나 예식의 하나를 넘어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하며 반드시 되찾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노래가 애국가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년남자가」, 「조국생각」, 「독립군 용진가」는 독립군가류다. 독립군 양성이 주된 목표였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대식 훈련은 일상이었고, 거기에 독립군가는 항상 함께했다. 군가풍의 힘찬 노래들은 힘든 훈련과 망명지에서의 고된 삶을 견딜 수 있도록 생도들의 투쟁 의지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 「국치추념가」와 「도강가」는 기념일 노래다. 기념일을 지정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날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인데, 이를 노랫말로 만들어 여러 사람이 기억해 부르도록 한 것이 기념일 노래다. 국치일과 3·1절은 당시 국외 동포들이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었고, 해마다 치르는 행사에서 모두가 함께 기념일 노래를 부름으로써 국치를 기억하고,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겼다.

신흥무관학교에서 공유했던 이상 7곡 노래는 모두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목표로 하는 항일노래다. 매일 아침 애국가로 조례를 시작하고, 훈련과 교과 과정 속에서 독립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국치일과 3·1절에는 남녀노소 모든 동포들이 항일의지를 담아 기념일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부르고 의식적으로 기억한 항일노래는, 일제의 탄압으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후에도 새로 옮겨간 투쟁과 삶의 근거지에서 면면히 이어져 새로운 독립운동단체와 동포들에게 전파되었다. 더불어 우리 동포들이 곳곳에 설립한 각종 학교와 민족학교 등에서 항일노래를 지속적으로 교육함으로써 다음 세대로 꾸준히 전승되었다. 이 같은 유·무형의 노력 속에서 항일노래는 일제에 대적할 정신적 무기로서 구전으로, 가사집으로 지금까지 전해졌다 하겠다.

[참고문헌]
『최신창가집』(광성중학교, 1914), 『가곡선집』(1920년대, 김희산·김한산), 『망향성』(1940년대, 이국영), 『광복군가집』(광복 군제2지대선전위원회, 1943),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2017),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본 항일음악의 창작·공유·전 승」(이명숙, 2022, 『역사와 현실』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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