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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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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57. 서울 4‧19 묘지 : 4‧19탑은 왜 수유리 골짜기에 있는가?

1995년 해방 50년을 맞아 보수언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진보진영의 민중사관에 맞선 한국현대사 재평가 움직임과 그 일환인 ‘이승만 복권운동’이었다. 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인 이승만 복권운동을 왜 이처럼 뒤늦게 벌이기 시작했는가? 그 답은 수유리에 있다.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부정선거 다시 실시하라!” 1960년 4월 19일 오후,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근 10만 명에 달하기 시작했다. 전날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회 연좌농성을 마치고 귀가하던 고대생들을 이승만 정권이 사주하는 정치 깡패들이 쇠몽둥이 등으로 무차별 공격한 데에 분노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4.19 혁명 관련 사진들. 초등학생들까지 참가한 것이 이색적이다.

‘탕탕탕!’ 갑자기 경무대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의 총구가 불을 토했다. ‘피의 화요일’과 함께 4.19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수유리 4‧19 묘역에 가면 4‧19 민주혁명기념탑 뒤로 줄지은 묘비들이 늘어서 있다. 18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찰에 의존하고 경찰을 우대해온 이승만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눈에 보이는 차를 징발해 시내를 누비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경찰과 계엄군에 쫓겨 저항본부인 고려대학교로 후퇴했다. 고려대학교가 ‘4‧19의 전남도청’이었던 셈이다. 5‧18의 전남도청 학살과 같은 참극이 고려대학교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전두환과 달리 당시의 지휘관이 두 명의 부관을 데리고 직접 학교 강당으로 찾아가 태극기로 덮은 시신들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고, 이를 본 시위대가 군을 믿고 무장을 해제했다.

▲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시위와 관련해 고려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4.19혁명 기념 조각 ⓒ손호철
▲ 마산 3.15 기념관에는 학생 등 시민들에게 발포한 경찰에 대해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라고 한 이기붕 부통령의 망언이 쓰여 있다.

진정되어 가는 것 같던 정국은 학생들에 이어 교수들이 나서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미국까지 이승만의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 하야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그러자 이승만도 마지못해 하야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이후에도 갑자기 자신이 사임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사임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최후까지 비겁한 지도자의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다가 주변의 압력으로 결국 서명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처럼 이승만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을 180여 명이나 빼앗고 쫓겨난 지도자이다. 즉 그는 박근혜에 앞서 국민의 손에 쫓겨난 최초의 지도자였다(최소한 박근혜는 이승만처럼 근 200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죽이고 물러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승만보다는 덜 나쁜 지도자였다. 박정희도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시위대에 발포를 해 이처럼 많은 국민들을 공개적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그를 복권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 4.19 혁명 후 하야 압박에 굴복,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의 사진이 화진포 이승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기념관인 만큼 설명이 이승만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이, 4‧19의 원인은 사건사적 원인과 보다 구조적인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장기집권을 위한 3.15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대구의 2.28 시위와 마산의 시위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 유기 사건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1회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프레시안> 2021년 3월 31일자와 12회 ‘진보의 요람과 보수의 아성 공존하는 도시’ <프레시안> 4월 2일자 참조). 설상가상으로, 이승만 정권이 4월 18일 깡패들을 동원해 고대생을 습격한 것이 4‧19를 촉발했다.

구조적으로는, 이승만 장기집권과 심각한 실업 등 경제 위기에 대한 반감이다. 특히 대학졸업생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등 청년실업이 심각해 청년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50년대 우리는 미국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방적, 제분, 설탕이라는 ‘3백산업’)이 중심이었는데 1950년대 말이 되며 이 같은 원조가공 산업화가 소진된 데다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바뀌면서 원조를 크게 줄이자 경제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에 미‧일‧한국으로 이어지는 안보 삼각동맹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압박했지만, 이승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를 교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우선 ‘4‧19 혁명’이라는 명칭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성공 후 4‧19의 명칭을 ‘4‧19 의거’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4‧19는 정말 혁명인가? 혁명이라면 왜 혁명인가? 혁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승만을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라면, 4‧19는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항쟁’일 뿐이다. 사회구조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말에 시작해 2017년 초까지 계속된 촛불항쟁이 박근혜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촛불혁명’은 아니다. 나는 촛불 당시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그것이 촛불항쟁 속에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내자는 것을 넘어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급진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살려서 촛불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현실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즉 촛불혁명이 아니라 ‘촛불항쟁'(내지 ‘실패한 촛불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면 4‧19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4‧19 항쟁’인가? 나는 4‧19를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4‧19는 혁명이되,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승만 하야 이후다. 4‧19는 이승만 하야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 하야로 그 1단계가 끝나고 2단계가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적 요구들이 거세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보도연맹, 거창 민간인학살 등 수많은 학살의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움직임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유가족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특히 거창의 유가족들은 학살에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이장에게 사과를 요구하다 거부하자 산채로 불을 질러 버렸다. 어용노조에 대항하여 교원노조와 같은 자주적인 노조가 생겨났고, 사회대중당,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이 나타나 국회에 진출했다.

가장 극적인 것은 극우 분단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남북한영세중립화를 통한 통일운동이 나타났고, 혁신정당들과 조직들이 자주·평화·민주 3대 원칙 하에 남북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결성했다. 1961년 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남북학생들의 평화교류를 추진했다. 이는 극우 분단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5‧16 쿠데타로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또 다른 문제는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잘못된 경향이다. 물론 4‧19에서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들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 하층민들이다. 이는 4‧19 희생자들의 분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86명의 희생자 중 학생은 22명에 불과하고 하층노동자 61명, 무직자 33명 등 도시 하층이 절반에 달한다. 따라서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것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외면하는 일면적인 인식이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 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이 공사를 진행하여 오늘로써 제막식을 거행하다.’

▲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 ⓒ손호철

나 자신이 ‘운동권 출신’인 만큼 수유리 4‧19 묘역은 가끔 찾아가는 ‘마음의 성지’지만, 이번 답사를 하면서 4‧19 혁명기념탑 앞조각 뒤편에 새겨진 이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19 묘역이 5‧16 쿠데타 직후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것도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군사독재 냄새가 풀풀 나는 조직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이를 다시 ‘민주 성역화’ 한 것은 김영삼 정부다). 그것만이 아니다. 탑의 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이라고 극찬했고, 4‧19를 짓밟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공화당의 창당선언문을 써주었으며 이후 유신과 전두환 지지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어용지식인 이은상이 썼다는 것도 발견했다.

아무리 5‧16 세력이 그와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을 ‘성웅’이라고 칭송하고 문인들을 모아 지원유세를 다녔으며 김주열 시신 인양과 함께 터져 나온 4‧11 마산의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특히 “고향 마산에서 터져 나온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고 했던 이은상에게 4‧19혁명기념탑 글을 의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몇 년 전 자신이 성웅이라고 칭송한 이승만을 무너뜨린 4‧19, 자신이 ‘북괴를 도와주는 이적 행위’라고 힐난한 4‧11의 연장인 4‧19에 대해 탑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이은상의 탑문은 현 4‧19묘역이 비극을 넘어 희극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 5.16 쿠데타 세력은 4.19 혁명을 기념한다며 이승만을 성군이라고 찬양하던 어용 문인 이은상에게 4.19 기념글을 짓게하여 써 놓았다. ⓒ손호철

놀라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래 4‧19기념탑을 광화문에 세우려 했으나 데모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유리 골짜기로 귀양 보냈고, 탑은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조각가인 김경승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전두환이 1987년 황토현 동학전적지에 세운 전봉준 동상도 세웠는데 정읍시는 최근 이를 철거하고 동학의 정신에 맞는 동상을 새로 세우기로 했다). 넓은 공간이 필요한 묘역은 몰라도 기념탑은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이나 청와대 앞에 세워야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수유리에 세웠는가?

수유리 4‧19묘역을 떠나려는데, 한 자료에서 읽은 최석태 서울민족미술협회대표의 주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5‧16세력이 4‧19를 짓밟지 않았나? 그것을 가리려고 성역화한 것 아닌가? 4‧19탑에는 정신이 송두리째 빠져있다. (…) 4.19탑은 철거돼야 한다. 아니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야 한다. 친일작가들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증거로, 친일유물로.” 맞다. 새로운 4‧19탑을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세워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7-19> 프레시안

☞ 기사원문: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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