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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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찾아서(2)

주동욱 서울 송파 후원회원

광주(광저우)에 도착하다

2020년 1월 10일 ‘아리랑 답사단’ 33명이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광주(광저우, 廣州)에 도착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이 공항에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아리랑 로드〉 답사는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과 연구에 앞장선 광동지부 회원들이 기획했다.
중국 남방지역 역사 답사는 드문 편이다. 이번 〈아리랑 로드〉는 독립운동사 전공자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 많고, 김산(金山)의 삶에서 가장 치열했던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여서 관심을 끌었다. 버스에서는 이정찬 교수의 열정넘친 중국 근대사 강의가 날마다 이어졌다.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는 답사자도 눈에 띄었다.
첫날 광주공항에서 동쪽으로 험한 길과 산을 넘어 용문현(龍門縣) ‘홍군 4사(紅軍 4師) 주둔지’에 도착했다. 1927년 12월 광주봉기(광저우기의) 실패 후 약 1,200여 명의 봉기군이 화현(花縣, 현재 화두 화성소학교)에서 개편한 부대가 홍군 4사이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20여 명이 홍군 4사에 있었다.

 

고담진과 해풍 답사

이튿날 고담진(가오탄, 高潭鎭)의 ‘붉은 거리’를 산책하며 본격적인 답사에 나섰다. 홍군 4사부대가 잠시 머물렀던 ‘붉은 거리’는 1927년 러시아혁명 10주년을 맞이해 조성되었다. 마르크스 동상이 세워진 광장을 중심으로 마르크스거리, 레닌거리가 이어졌고 건물마다 사회주의 혁명 구호가 적혀있다.
답사단은 연화산(蓮花山) 선인동을 거쳐 해륙풍(하이루펑, 海陸豊)의 주요 도시인 산웨이(汕尾) 해풍(하이펑, 海豊)으로 향했다. 광동성 해풍현(海豊縣)과 륙풍현(陸豊縣)을 합쳐 부르는 해륙풍은 중국 최초로 농민소비에트가 세워진 곳이다.
농민혁명가 팽배(펑파이, 彭拜)가 일찍이 해풍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며 농민자위군을 창설했다. 광주에서 반혁명 정변(1927.4.15)이 일어나자 팽배가 지도하는 농민자위군이 해륙풍에 혁명근거지를 마련한다. 그 뒤 남창봉기(南昌蜂起,1927.8.1)에 참가한 부대가 해풍에 도착하여 홍군 2사(紅軍 2師)로 편성되었다. 마침내 홍군 2사와 혁명군이 봉기(1927.10.30)하여 해륙풍 일대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다.

 


‘팽배의 도시’답게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답사단이 ‘해풍혁명투쟁사기념관’에 도착하자 기념관장이 직접 안내를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 역사를 비롯해 광동꼬뮌과 중국대혁명(동정・북벌)에 참여한 조선인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김산 등 조선인 혁명가 15명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홍궁 홍장(紅宮 紅場)’은 해풍소비에트 대표회의와 군중대회가 열린 곳이다. 김산을 비롯해 홍군 4사가 해풍에 도착하자(1928.1.6) 수 만 명이 홍장에 모여 ‘인민대회’와 ‘조선인동지환영대회’를 열었다. 특히 홍장에는 홍군 2사와 홍군 4사 부대의 상봉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김산이 교편을 잡았던 ‘동강당교(東江党校, 현재 해성제2소학교)’를 방문했다. 학교에서 답사단을 맞아 환영회를 열고, 교장이 당시 조선인의 활약에 대해 설명했다. 김산은 동강당교 교관으로 세계혁명사,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선전공작을 지도했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은 해풍 소비에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언젠가 조국에 돌아가 이러한 운동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곧이어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오파령(우푸링, 五坡岭)’을 찾았다. 〈아리랑〉에서 ‘오복령(五福嶺)’으로 잘못 표기된 곳으로 지금은 한적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1928년 5월, 홍군은 해풍을 포위한 국민당 정부군에 맞서 오파령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쳤으나 패한다. 김산은 생존자의 최후 집결지인 검유령(젠유링, 劍遊嶺)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며 목숨을 건졌다. 광동지부에서는 연화산 일대를 검유령으로 추정하고 있다. 답사단은 ‘홍군 4사 임시사령부’가 있던 부담촌(浮潭村)에 들린 뒤 동관(東莞)으로 향했다. 동관은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이 일어난 곳이다.

 

광주(광저우) 답사

중국 광주는 중국 대륙 남부를 굽이쳐 흐르는 주강(珠江) 삼각주 하류에 자리 잡은 도시다. 광주에서 답사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편의상 중국근대사 서술에 따라 답사 유적지를 정리했다.

 

1) 황화강72열사능원(黃花崗七二烈士陵園) 3・29봉기(황화강사건)의 희생자 72명이 묻혀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부터 쑨원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가 청나라에 맞서 무장봉기 했으나 거듭 실패한다. 1911년 4월 27일(음력3월 29일), 120여 명의 결사대가 다시 봉기했지만 86명이 희생되었다.
동맹회 회원 판다웨이가(潘达微)가 피로 얼룩진 시신 72명을 찾아 수습해서 황화강에 매장했다. 3・29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 해 10월 10일 우창봉기(武昌蜂起), 곧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도화선이 되었다.

 

 

2) 루쉰기념관(魯迅紀念館)・중국국민당1차대회의 구지
루쉰은 광주 중산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기념관에 루쉰의 숙소와 강의실 등을 꾸며 놓았다. 루쉰기념관에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린 강당이 보존되어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을 결정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4년 1월 20~30일에 중국국민당 대표회의가 열렸다. 공산당원 모택동(毛澤東)・구추백(瞿秋白) 등도 참여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된다.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권준(權晙)은 강당 2층에서 대회를 참관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두 사람은 그뒤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졸업하고 북벌에 참전했다.

 

 

3)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쑨원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지만 광주시 황포 장주도(長州島)에 있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렀다. 개교 뒤 학교장에 장개석(蔣介石), 정치부 부주임에 주은래(周恩來)가 선임
되었다.
1925년 8월경 의열단 간부진과 단원이 광주로 오고, 의열단 본부도 광주로 옮긴다. 그 뒤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과 많은 조선인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거나 교관으로 활동했다.

 

 

4) 중산대학 구지(中山大學 舊址)
쑨원(孫文)은 황포군관학교를 열고난 뒤 정치 간부도 양성하고자 1924년 11월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한다. 이듬해 쑨원이 서거하자 그의 호를 따서 1926년에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따르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산은 1926년 중산대학 의학과에 편입하고, 유월(留粤, 광동의 별칭)한인청년동지회・조선혁명청년연맹에서 조직 활동을 한다. 시인 이육사(李陸史)도 김산과 함께 유월한인청년동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1926년부터 북벌이 시작되었다. 국민혁명군이 우한(武漢)을 함락하고 광주에 있던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다.
그러자 장개석이 상해에서 반공쿠데타(1927.4.12)를 일으키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운다. 중국의 정세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광주에서도 국민당이 대숙청을 벌였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에서 ‘기의(起義)’했지만 3일만에 무너지고 7,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는 “광주와 중국을 혁명의 바람 속으로! 우리 조국을 독립의 바람 속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에 참여한 약 200여 명의 조선인도 포함되었다.
광주봉기를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대규모 열사능원이 조성되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억센 손으로 총을 쥐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열사능원 공원에 있는 ‘혈제헌원정(血祭軒轅亭)’과 동상도 눈길을 끌었다. 옥중결혼식을 올리고 같은 날 처형된 저우웬용(周文雍)과 첸티웨진(陣鐵軍)를 추모하
기 위해 세웠다.
많은 한인들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찾는다. 중조혈의정 석비 앞면에 “중국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쌓은 우의여, 영원하라!(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는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아리랑 답사단의 묵념이 끝나자 열사능원에 어느덧 긴 어둠이 내렸다.

 

6)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었다. 쑨원의 친필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백성을 위한다.”는 글 뜻에서 쑨원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 수 있다.

 

7) 대한민국임시정부광동청사(東山栢園)

광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건물이 남아있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요인들과 가족이 호남성 장사(長沙)를 떠나 7월 22일 광주에 도착했다. 임정요인들은 광주 동산백원(東山栢園)에서 약 두 달 간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 2017년 건물의 현존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지만 입구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

8) 대신공사 옛 건물·동아대주점·대동빈관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이 1919년 광동으로 오자 환영회를 개최한 대신공사 옛 건물, 3·1 독립선언 4주년 기념식을 치른 동아대주점, 여운형(呂運亨)·신규식(申圭植)·민필호(閔弼鎬)가 묵었던 대동빈관 건물이 남아 있다.

 

답사를 마치며

 

광동성은 옛 월(越)나라 땅이었다. 변방은 변혁의 땅으로 거듭났다. 태평천국운동, 변법자강운동,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가 움텄던 중국혁명의 발상지 광동성은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1920년대 김산・이영(李瑛, 이준열사아들)・박진(朴鎭) 형제 등 수많은 엘리트 조선인이 광동으로 왔다. 이념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를 탐구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넷째 날 답사단은 영서봉림으로 이동해 송별회를 가졌다. 약 한 세기 전 뜨거운 조국애를 갖고 숨진 열사들을 기억하며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인터내셔널가’의 노랫소리가 광동성 널리 울려 퍼졌다. 분단으로 위축된 이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보다 깊고 넓다는 것을 느낀 답사였다.
2020년 〈아리랑 로드〉 답사는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의 헌신과 노고가 아니었다
면 불가능했다. 김유 지부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끝까지 동행했고, 박호균 사무국장과 신광용・김선주 선생이 애정과 열정으로 답사를 이끌었다. 또 많은 광동지부 회원이 함께 동행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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