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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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버스이동시간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 흔한 자기소개도 안 시켜서 숫기 없는 나로서는 매우 감사했다. 연구소에서 정성껏 준비한 간식 봉투, 물과 커피음료, 수첩과 필기구, 맛깔난 전라도 상차림의 점심과 저녁식사, 전북 민문연 회원들께서 준비해주신 김제농협 신동진쌀까지 선물로 그득히 받았다. 참가비도 없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도 받기가 송구스러웠지만 20여 년 민문연 회비를 내었으니 오늘은 되받는다는 생각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합리화해봐도 참으로 많이 챙겨주셨다.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허수열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의 세례였다. 이날 들은 지식들은 식민지근대화든 조국근대화든 경제대통령이든 근대화시켜준다 잘 살게 해준다는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욕망을 채우려는 세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조용하면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들이었다.

10월 5일 토요일. 날씨는 맑았다. 사실 군산 답사라길래 군산 시내 곳곳의 적산가옥이나 항만시설을 둘러보는 것인가 하고 떠났는데, 자료집을 여는 순간 온통 논과 강줄기와 방조제만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도심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답사라는 것을.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호남의 너른 들 자체가 오늘 답사지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김제 죽산리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과 원평천 해창갑문을 제외하고는 구경온 사람들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량하여 별스럽고 그래서 더 전문적인 연구자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답사단원들이었다.

이 답사를 원경으로 묘사하면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의 평화로운 그림, 근경으로 묘사하면 수확기가 되어도 내 배 채울 곡식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황금들판 액자틀 같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고향이 경상도여서 서울에서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산으로 턱턱 막힌 도로만 보다가 난생처음 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나 경이로웠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탁 트인 지역이 있구나 산이 없는 땅이 있구나… 이렇게 광대한 들에서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 수확했는데 모조리 수탈당한다면 동학 농민 봉기뿐 아니라 더한 것도 일어날 만 했겠구나 라고 한방에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인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땅이라고 교수님께서 해설해주셨다. 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갔던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 속으로 들어가 한 점이 된 하루였다. 자료집 구글 어스 사진으로 보아도 실제 내 눈으로 보아도, 넓은 만큼 물도 많이 필요했겠는데 물은 드물어 보였고 그래서 수리시설 보급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했던 지역이었나 보다. 교수님 설명이 이 지역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서 남쪽 섬진강 수계에게 유역변경방식으로 물을 끌어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답사 경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낙양취수장 낙양취입수문부터 하구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진강 하구언, 정읍천 합류지점인 만석보를 들렀다가, 벽골제 둑길을 따라 수문까지 걷고, 방조제인 하구 갑문까지 가는 코스였고 중간중간 일본인 지주들의 곡식창고와 관리소를 들렀다. 만경현이라는 이곳 지명이 붙여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였고 ‘경’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의 면적 단위이므로 그 오래전부터도 경지면적이 아주 넓다는 뜻을 담은 지명을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했을 시기부터 있었던 벽골제와 고려, 조선 시대의 수리시설 보강 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점차 근대적 토목공사로 현대화되어왔을 수리시설은 현재 수문이나 농업용수 공급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가는 곳곳 물이 하천 바닥에만 겨우 수맥을 이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로워야 할 이 가장 넓은 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빈곤해보였고,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농촌은 더 망가졌고, 일제 수탈의 시기나 그 전 전근대 왕조시대 수탈을 생각해보아도 이 광활한 평야의 경작자들이 그 어느 시절 언제 한번 풍요로운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종일 들판을 걸으면서 이 좋은 가을날씨와 평화로움을 마냥 만끽하기에는 계속해서 처연한 기분이 함께 찾아왔다.

역사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배운 만석보는 기대하고 갔으나 터에 기념비 하나 남겨놓은 것 빼고는 흔적도 영역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관광자원개발까지는 아니라도 안내문이라도 상세히, 혹은 고부봉기를 자세히 학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 이곳이 더 의미있게 기억되고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사라져간 동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길이 기억될텐데. 친일파의 흔적들은 역겹게도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뒤 등 곳곳의 비석에 남았는데 정작 이름 없이 사라진 중요한 민중들의 역사야말로 우리 손으로 더 영광스럽게 남겨주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답사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반박이었고 교수님은 그들의 허술한 근저를 보여주셨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의 대두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 내의 반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일본 극우는 후쇼사의 교과서를 채택시켰고 세력을 강화하여 지금의 아베 정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 우파의 목소리를 국내에서 메아리로 화답하던 뉴라이트도 이들과 함께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보다 10년 늦게 교학사교과서 선정과 국정교과서 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우파 교학사교과서는 전국 채택률 제로 신화를 이룩해냈으며 국정교과서 제작 지시를 내린 자를 축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이 나라 국민들이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남은 저들의 마지막 보루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이며 그 마지막 토사물이 <반일 종족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민족인데 자기 민족을 종족이라고 부족 수준으로 폄하하는 이 국적 불명의 연구자 집단이 왜 한국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지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지점이다.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서 활약하면 더 각광받을 텐데.

답사 자료집을 설명해주시면서 교수님은 1910년대 큰 수치로 성장하던 경제성장률을 저들이 우량품종의 보급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1917년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것은 1910년대도 아닌 1921년의 지도였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이 지역은 그들이 얘기하듯 일본 덕에 옥토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리시설 보강으로 이 시기에 이미 옥토였고, 오히려 수탈에 의해 황폐해진 그 아픈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발굴해서 복원해놓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의 수문 위치를 보니 이영훈이 말하는 대로라면 벽골제가 방조제였고 그래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일제에 의해 개발되기 전 황량한 갯논이었다는 주장이 말할 필요도 없는 엉터리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 들에 단 한번이라도 와봤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날 답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거짓을 눈으로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김제군이나 옥구군, 익산군처럼 일본인 소유지 중 면적이 넓은 곳만 하천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도 교수님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발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탈해간 토지로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일본 상인과 재벌들이었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여름 별장은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낙엽송으로 외벽을 두르고 마루는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를 깔고 지붕은 자연석 청판석을 덮은 호사스런 건축물로 공사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했다고 하였다. 그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규모로 신축되어-지역에서 무슨 용도로 최근에 왜 신축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2층 높이로 우람하게 서있는데 그 높은 건물을 가득 채웠을 쌀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그 부를 가지고 또다시 조선의 문화재들까지 수집하고 반출하는데 썼다고 하니 이중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통계는 위험하다. 통계는 특히 과거의 통계는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성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통계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한 번 더 왜곡된다. 교수님은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전까지는 조선의 토지와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후에도 과거의 통계를 일제 스스로 두 번이나 전면 수정하는 등 총독부 스스로도 못 믿을 통계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했다. 저 친일학자들은 그 엉터리 통계에 기반하여 모래탑을 쌓아올린다. 식민지근대화 논리는 이 위험한 숫자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 국민 잘 살게 해주려고 개발을 시작했는가? 수치 몇 개로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없다. 키플링이 백인의 짐이라고 하며 지배했던 아프리카에 영국인들이 과연 흑인을 잘 살게 해주려고 들어갔던가,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 실제로 잘 살게 되었는가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친일학자의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진정 조선인들을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가? 그 개발로 조선인들은 모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의 보물인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허수열 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을 찾아 읽는 것으로 이날의 끝도 없이 넓은 광야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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