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병상 신부님, 인천 하늘의 붉은 독수리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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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소장

이 글은 올 12월에 출간 예정인 ‘김병상 신부님 자서전’에 실린 글이다.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 신부님은 지금 병상에 계신데 하루속히 쾌차하시길 빈다.

  작년(2017년) 봄 어디선가 가톨릭 인천교구 사제였던 고 최분도(Benedict Zweber, 1932-2001) 신부의 평전인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에 대한 안내 기사를 보며 울컥 하며 홀연히 저 어두웠던 1970년대의 후반기를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통치가 정면 공격을 당하면서 한참 휘청거렸던 시기에 나는 모종의 인연으로 이재문 선생과 자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제1차 인혁당사건(1964)에 연루되었던 까닭에 제2차 인혁당 사건 조작을 위한 검거(1974) 조짐이 보이자 발 빠르게 잠수를 타고 대구를 벗어나 서울에 머물렀다. 만약 그가 체포당했다면 박정희 정권 최대의 사법살인사건인 역사적인 1975년 4월 9일의 8열사가 9열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희생에 가장 가슴 치며 크게 통곡한 이는 아마 가족 말고는 이재문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선생은 매년 이날을 맞아 추모의 예를 올리곤 했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쨌든 이재문 선생은 서울에서 마술사 같은 변장으로 피신하면서도 민주투쟁을 그치지 않았고, 이와 정비례해서 수사당국은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 못지않은 투사인 부인 김재원 여사가 어린 남매들을 데리고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인천 최분도 신부의 성당이었다. 신부님은 김재원 여사의 정황을 익히 알고서 스스로 보호해주고자 그 가족을 성당에 기거토록 했기에 감시는 으레 따를 것도 짐작했으리라.
  이때 이재문 선생과 그 가족의 안부 및 최분도 신부님에게 감사 인사 전하기 등등을 전해준 역할을 내가 잠시 맡았던 적이 있었다.
  가톨릭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최분도 신부의 소속이 미국의 매리놀(Maryknoll Society)파로 1961년에 인천 지역을 중심삼아 평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해방신학적 성향이라는 것, 인혁당의 사법살인을 저지시키고자 박정희독재에 정면 도전했다가 1975년에 추방당한 제임스 시노트(James Sinnott) 신부 역시 이 교파임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정작 놀란 것은 최분도 신부의 평전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를 출간하도록 앞장서신 분이 바로 김병상(金秉相) 신부님이라는 것이었다.
  아, 저 암울했던 1970년대 하반기에 신세졌던 최분도 신부님의 평전을 2010년대에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으로 내가 크게 신세졌던 김병상 신부님이 앞장 서셔서 내주셨으니 나는 결국 세기를 뛰어넘어 김병상 신부님에게 큰 짐을 드렸구나 하는 묘한 인연을 느꼈다.
  최분도 신부님을 비롯한 1970년대에 대하여 좀 여쭤봐야지 하면서도 우물쭈물 아직까지 화두를 못 꺼낸 채로 있다. 뵈올 때면 잊어버리고 헤어지고 나면 아차 하면서도 전화로 화두에 올리기에는 부적절해서 여태껏 미뤄오고 있는 참이다.
  김 필립보 신부님의 고명을 처음 전해준 건 작고한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 의원이었다. 유신 선포와 더불어 2년 형을 살고 출감한 김 의원은 1970년대 후반기에 리영희, 한승헌, 장을병, 한완상, 김중배 선생 등과 불초 소생은 막내로 끼어들어 ‘으악새’ 친목회를 만들어 으악새처럼 으악으악 비벼대면서 새 시대를 잉태시키고자 모든 예지를 모으고 지냈다. 화두는 각계의 민주인사들 근황이 가장 많았는데, 가톨릭계의 전위적인 투사로 김병상 신부님이 자주 올랐다. 그러나 1979년 10.26 직전 나는 이재문 선생과 얽혔던 사건으로 감옥행 해버려 고명한 김 신부님을 뵈올 기회를 놓쳐버렸다.
  1983년 출옥해보니 유신을 뺨 칠만큼 세상은 더 나빠져 버렸고, 김상현 의원도 5.18사건에 연루됐다가 나왔으나 정치활동을 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가 되어 저절로 신부님에 대한 존경심이 민주화운동 동지에서 신앙의 인도자로 증폭되어 있었다.
  김 의원은 어느 날 예술의 전당에서 유럽 고전 명 오페라 장면 모음 공연을 하는데 김병상 신부님이 오시기로 했으니 함께 가자고 하여, 그 로비에서 나는 처음으로 김 신부님을 뵙게 되었지만, 나중 신부님은 이때의 장면을 기억 못하시는 것 같았다.
  이미 김병상 신부님은 인천 지역 최초로 1977년 답동성당에서 유신헌법반대 기도회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된 경력 이후 화려한 붉은 독수리 사제로 인천의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이 찬연하듯이 암흑의 시대라야 훌륭한 선배님을 우러르게 되는 게 세상과 역사의 이치다.
  함세웅 신부님은 항상 김병상 신부님을 몬시뇰 신부님이라고 불러, 이상하다 필립보 신부님인데 하고 갸웃거리다가, 몬시뇰(Monsignor)이란 나의 주님(my lord)이란 뜻으로 연로하신 존경할만한 분들께 로마교황청이 명예직 서임(2003년)하는 호칭으로 빨간색 수단을 입을 수 있다는 영예로움임을 알고는, 아하 언젠가는 꼭 빨간색 수단 정장 차림의 김 몬시뇰 님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역시 붉은 독수리는 빨간 정장을 해야만 권위가 서지 않을까. 이런 영예를 얻은 신부님이 우리나라에는 몇 분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공경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유구한 인연으로 맺어진 김 몬시뇰 신부님과 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계기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모시면서였다. 연구소는 초대 이사장으로 이돈명 변호사(1995년 6월-1999년 9월)에 이어 2대 이사장이셨던 독립투사 조문기(1999년 10월-2008년 2월) 의사가 작고하시면서 부득이 3대 이사장을 모셔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조 이사장의 후임으로 일찌감치 낙점해 두었던 함세웅 신부님이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라 임기가 끝나면 맡겠으니 일단 김 몬시뇰(2008년 7월-2013년 1월)에게 매달리기로 했다. 햇수로 5년간 맡으셨던 연구소 이사장직을 수행하심에서 김 몬시뇰 신부님은 평화의 사제로 일관하셨기에 너무나 황송했는데, 건강문제로 간곡히 쉬게 해달라고 하셔서 무거운 짐을 함세웅(2013년 2월-현재) 신부님에게 인계했다. 그런데도 민족문제연구소의 큰 행사 때면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언제나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셨다.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은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의 숙원이었던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그 기념식을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 선생님 영전에 바쳤던 행사일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번 동지는 영원한 동지라는 공식을 갖고 있어서 김 몬시뇰 신부님은 영원한 이사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신부님의 강론을 내가 직접 들었던 건 2009년 5월 28일 밤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미사(이튿날이 장례식)에서였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행렬을 보며, 노 전 대통령이 모든 이의 가슴속에서 부활해 살아있음을 느껴, 신부들이 부활절에 입는 흰색 제의를 입었다”라고 해명한 김 몬시뇰 신부님은 이렇게 포효했다.
  “예수를 처형한 장소에 로마가 경비병을 세웠듯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조문 온 시민들을 전경으로 둘러쌌다, 치졸하다”라며, 역사의 진리를 설파했다. “20억 명의 크리스천들의 기도문에는 예수를 죽인 로마인 정치가가 나온다,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이 기획수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을 죽였다는 사실 역시몇 백 년 동안 기억될 것”이라고 대못을 박았다.
  이렇게 성당 안에서 정치적 감각을 살려낼 줄 아는 신부님의 큰 품은 우리 현대 민주화운동사에서 인천 하늘의 붉은 독수리 신부님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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