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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日 징용피해자 유족 22명 정부상대 손배소

2009년 9월 10일 587

日 징용피해자 유족 22명 정부상대 손배소(연합뉴스, 09.09.10)

일제 강점기·독재시절 ‘저항 카타르시스’-기자협회보(08.02.13)

2008년 2월 14일 543

일제 강점기·독재시절 ‘저항 카타르시스’

[김효순칼럼] 숭례문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한겨레신문(08.02.12)

2008년 2월 14일 489

[김효순칼럼] 숭례문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일제 징용자 유가족, 정부 상대 첫 소송

2009년 9월 10일 570

일제 징용자 유가족, 정부 상대 첫 소송(ytn, 09.09.10)

고성군, 3·1독립지사 숭모제 11일 개최

2009년 9월 10일 542

고성군, 3·1독립지사 숭모제 11일 개최(뉴시스, 09.09.10)

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

2008년 2월 13일 793

    민족문제연구소   독립투사 고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안장식이 11일 오후 3시 대전 국립묘지에서 거행되었다.   ▲ 2008년 2월 11일 오후 3시 대전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독립투사 고(故) 조문기선생 안장식   앞서 선생의 유해를 실은 운구차량은 서울 시경의 교통 통제를 받으며 오전 7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떠나, 동대문구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 노제 성공회대성당 성프란시스홀 영결식 부민관 폭파의거 현장(현 서울시의회 본관) 노제를 마친 후, 수원 자택을 경유해 대전 국립묘지로 향했다. 영결식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 학계, 종교계, 정계 인사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임직원, 전국의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 200여 명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 안장식을 위해 운구되고 있는 독립투사 고(故) 조문기선생의 유해   안장식은 오후 3시 애국지사 제3묘역에서 거행됐다. 의장대가 고 조문기 선생의 유해를 운구한 뒤 영정 앞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근정됐다. 호상을 맡았던 류종하 광복회 수원 지회장이 고인의 약력을 보고하였으며. 이용원 국립대전현충원장과 김희선 김원웅 의원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집전 의식에 따라 유가족과 장례위원회 대표들의 헌화와 분향, 하관, 조총발사, 묵념 등의 순서로 안장식이 진행되었으며,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인사로 한 시간여에 걸친 공식 행사를 마쳤다. 이후 조문객들과 회원들의 헌화 분향이 계속됐다.   ▲ 고인의 약력을 보고하고 있는 류종하 광복회 수원 지회장   ▲ 헌화하고 있는 이용원 국립대전현충원장   ▲ 의장대가 고인을 기리는 조총을 발사하고 있다   허토가 진행되자,

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의 옛 부민관 앞 노제 현장

2008년 2월 13일 724

    민족문제연구소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집례로 진행된 부민관 노제   영결식에 이어 오전 11시부터, 부민관 폭파의거의 현장인 중구 태평로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노제가 거행됐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의 집례로 진행된 노제에는 영결식에 참석한 300여 명의 조문객들과 시민들이 함께했다.   ▲ 부민관폭파의거를 함께 거행한 고(故)유만수선생의 자제 유민(현재 주 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씨가 고인을 기리는 추도사를 읽고 있다.   생사를 건 폭파의거 삼의사 중 한분이자 고인의 평생 동지였던 고 유만수 선생의 장남인 유민 주 러시아 공사참사관은 ‘문기 아저씨’를 목메어 부르며 절절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선친과 고인이 평생 ‘미완의 독립’을 완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모습을 회고하며 나라의 ‘의(義)’만을 구했던 고인의 정신이 부민관 현장에 모인 많은 이들 속에 살아있음을 강조했다. 시민사회를 대표하여 조사를 한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고인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다짐했다.(*조사 전문은 연구소 누리집 추모게시판 참조)   ▲ 가수 손병휘 씨가 조가를 부르고 있다.   가수 손병휘씨는 ‘서시’와 ‘나란히 가지 않아도’ 두 곡을 노래해 고인의 삶과 보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표현했다.역사의 현장인 서울시의회에는 영정과 유족, 공동장례위원장 등 소수에게만 입장이 허락되어 참석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패색이 짙어가던 일제와 친일 주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이었다. 연합국의 최후 공세를 육탄으로 막아 황국(皇國))을 지키자는 결의를 하기 위해, 친일거두

“동해 병기 계속하겠다” WSJ 편집국장 확약

2009년 9월 10일 585

“동해 병기 계속하겠다” WSJ 편집국장 확약(뉴시스, 09.09.10)

일제 징용 피해자 유족 “위로금 취소” 소송제기

2009년 9월 9일 564

일제 징용 피해자 유족 “위로금 취소” 소송제기(한국일보, 09.09.05)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2008년 2월 12일 783

연구소 노제-조사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조세열 사무총장     ▲ 조사를 하고 있는 조세열 사무총장     하늘이시여! 어찌 이리 가혹하십니까.노(老)독립운동가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남은 소원마저 외면하십니까.선생님! 어찌 이리 무정하십니까.가야할 길은 아직도 먼데, 이 어려운 상황 속에 저희들만 남겨놓고 어디로 홀로 떠나가십니까. 선생님을 모신지 15년이 넘는 세월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제야 자리 잡고 민족사를 바로 세우는 큰일을 해보려는 이때,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입니까.병석에 계실 때, 저희들이 “선생님께서는 아플 자유도 없는 분이다. 선생님을 따르며 친일청산을 외치는 후진들을 생각하시라”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어느 누구를 의지하고 어느 누구를 사표로 삼아 나아가겠습니까. 야속함과 슬픔이 뒤섞여 눈물이 앞을 가리고 숨이 막혀옵니다.   ▲ 연구소 노제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는 의열투쟁에 빛나는 항일 독립투사 이전에 저희들에겐 삶의 지표이자 스승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교과서 속의 화석화된 애국지사가 아니라, 항상 현실 속에 발 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처절하게 고뇌하고 열정을 다해 실천하는 활동가로 일관하셨습니다. 항일과 반독재 친일청산으로 이어지는 선생님의 투쟁은, 일신의 안녕은 물론 가족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했지만, 평생을 변함없이 진정한 자주독립국가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구소가 내외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노구를 이끌고 몸소 친일청산의 보루를 지켜낸 그 뜨거운 충정을.저희들은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제 2의 독립군”이라고 외치시던 사자후를.저희들은 또 기억하고자